김을동(金乙東)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독립운동, 문화예술, 정치 영역에서 삼대에 걸친 의열과 공헌을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입니다. 1945년 해방 직후 태어난 그녀는 20세기 대한민국의 격동 속에서 배우·성우로 40년간 대중문화에 기여하였고, 2008년부터 국회의원으로서 역사 교육·보훈 정책·친일재산 환수 등 국가 정체성 강화에 매진해 왔습니다. 본 글에서는 김을동의 혈통·가족 이야기, 연예계 활동의 구체적 면모, 정치인으로서의 의정 성과, 그리고 4대 인명사전 등재라는 역사적 의의까지 심층적으로 조명하겠습니다.
김을동의 혈통과 가족 배경 : 독립·문화·정치의 삼중 유산
청산리 대첩의 영웅, 조부 김좌진 장군의 유산
김을동의 조부 김좌진은 1889년 11월 24일 경주에서 출생한 대한제국 말기의 무장 독립운동가입니다。일제강점기 초반 경술국치(1910년)를 맞이한 이후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등 본격적인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고,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 지역으로 진출하여 대한군정서에 참여함으로써 무장 항일투쟁의 중심축이 되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업적은 1920년 청산리 전투로, 북로군정서와 독립군 연합 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정규군과 벌인 이 전투는 일제강점기 독립군이 벌인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의 승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산리에서 벌어진 이 대첩에서 김좌진은 뛰어난 전술적 지휘로 일본군에 적지 않은 손상을 입혔으며, 대한민국 독립사상 하나의 전설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독립군의 계파 분열과 일제의 추격 속에서 고통받던 중 1930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 박상실의 암살로 41세의 나이에 순국하게 됩니다. 그의 유언은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 내가 죽어야 하다니, 한스럽다"였으며, 이는 조국 독립에 대한 그의 불타는 열정을 말해줍니다. 조부의 업적은 김을동이 정치에 입문한 후에도 한국사 교육 강화, 국가보훈 정책, 친일재산 환수 등의 형태로 구체적으로 계승되어 왔습니다.
시대의 애증 속 살아간 부친, 김두한의 드라마틱한 인생
김을동의 부친 김두한은 1914년 3월 10일에 태어나 1972년 10월 15일 타계한 인물로, 일제강점기 서울 종로 지역의 주먹 세계에서 출발하여 광복 후 정치인이 된 격동의 근현대사 상징인 인물입니다.
김두한은 어린 시절 아버지 김좌진 장군을 제대로 알 기회 없이 외할머니의 손에 성장하였으며, 가난 속에서도 강인한 체력과 격투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의 별명인 '잇뽕'(한방)은 한 번의 공격만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의미였으며, 이는 당시 서울 최고의 주먹으로 평가받게 했습니다. 드라마 '야인시대'(2002-2003년 방송)는 그의 일생을 극화하면서 이 드라마는 회당 최고 시청률 51.8%, 분당 최고 시청률 57.4%를 기록하는 한국 드라마사의 괴물 같은 작품이 되었습니다.
해방 후 김두한은 우익 청년활동으로 전향하였으나, 부친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계기로 확고한 반공 신념을 갖게 됩니다. 제3, 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1954년과 1965년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1966년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국회의원 석방결의안으로 무죄 선고를 받았고, 그해 9월 사카린 밀수 정경유착 비판 관련 국회 발언대에서 오물을 투척해 의원직 상실 및 구속기소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헌신과 가족사의 아픔
김을동은 2010년 MBC '기분 좋은 날'에 출연하여 평생 말하지 못했던 가족사의 진실을 공개하였습니다. 이에 따르면 김을동은 무려 8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 김두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아버지는 집 밖에서만 활동하는 인물이었기에,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가정 경제를 책임져야 했고, 전기 대신 숯을 사용하면서 만성 가스 중독으로 불과 60세가 조금 넘은 나이에 타계하게 됩니다.
어린 김을동은 어머니의 고생을 목격하면서 자연스럽게 책임감과 효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후 그녀가 정치와 사회 사업을 추진할 때 "선대의 희생이 지금을 있게 한 것"이라며 감사와 결의를 표현한 이유는 이 어린 시절의 경험에 근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김두한은 또한 외도로 이복동생들을 두기도 했으며, 이는 가족 간의 복잡한 감정을 초래했습니다.
배우·성우로서의 40년 예술 활동
연기 첫 발을 떼다 : 중학교 우연의 만남에서 시작된 인생
김을동의 연예계 입문은 중학교 2학년 때의 우연한 여성국극 관람에서 시작됩니다. 가난한 가정 형편 속에서 어머니가 참고서를 산다는 거짓말로 공연 티켓을 구입해 자주 극장을 찾아다녔던 그녀는, 1963년 정식 연극배우로 데뷔하게 됩니다. 1964년에는 뮤지컬 무대에도 나섰고, 1967년 동양방송(TBC) 공채 성우에 합격하여 방송계로의 본격적인 진출을 이루게 됩니다.
당시 김을동은 매우 자신이 없었습니다. 본인의 용모에 대해 "제 인물 가지고 어떻게 텔레비전을 하겠습니까?"라고 말했을 만큼 자신감 부족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인기 있던 배우 장미희나 정윤희 같은 선배로부터 방송국에 추천받으면서 기회를 얻게 되었고, 이 추천이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극본 제작진의 최고 신뢰 : 다채로운 역할의 완성
김을동은 40여 년간 드라마, 영화, 성우, 시트콤 등 거의 모든 장르에서 활동한 다재다능한 배우입니다. 1992년 KBS2TV 드라마 '적색지대' 수녀원 원장 역으로 출연할 당시 인터뷰에서 스스로 "간호사를 빼고 다 맡아 본 것 같다"고 농담 삼아 말할 만큼 역할의 폭이 광범위했습니다.
특히 드라마에서는 상궁 역할로 자주 캐스팅되었으며, 대표 출연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전설의 고향' : 한국 대표 공포·전설 드라마로서 국민적 사랑을 받던 작품에 출연
- '용의 눈물' : 조선 건국을 배경으로 한 대작 사극에 참여
- '김치 치즈 스마일' : 2007-2008년 MBC 시트콤으로 방송 인기
- '며느리 전성시대' : 세대 갈등을 다룬 인기 드라마
- '반올림 3' : 드라마 3부작의 세 번째 작품에 출연
영화에서는 '마파도' 시리즈(2005년 시즌 1, 2007년 시즌 2)에서 '여수댁' 역을 맡았고, '카리스마 탈출기'(2006년)에서 민주의 어머니 역을 연기했습니다. 특히 마파도 시리즈는 2000년대 중반 대표 드라마로서 많은 시청자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 연도 | 제목 | 역할/매체 | 비고 |
|---|---|---|---|
| 1963년 | 연극 첫 무대 | 연극배우 데뷔 | 중학 재학 중 시작 |
| 1964년 | 뮤지컬 | 뮤지컬 배우 | 무대 경험 확대 |
| 1967년 | 동양방송(TBC) | 공채 성우 입사 | 방송계 공식 진출 |
| 1979-1980년 | '야! 곰례야' | 드라마 | 초기 드라마 활동 |
| 1988-1995년 | 다수 드라마 | 성우/배우 병행 | 40여 년 활동 기간 |
| 2005-2007년 | '마파도' 1, 2 | 여수댁 역 | 영화 대표작 |
| 2006년 | '카리스마 탈출기' | 민주 모 역 | 영화 출연 |
| 2007-2008년 | '김치 치즈 스마일' | 시트콤 | MBC 인기 시트콤 |
후배 배우 육성의 멘토 : 김을동 사단의 형성
김을동은 단순한 배우에 그치지 않고 많은 후배 연기자들의 멘토로도 활동하였습니다. 연기 지도를 받은 후배들 중에는 유동근, 박상원, 전광렬 등 훗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시 야외촬영을 나갈 때면 후배 배우들이 보따리를 들고 따라다닐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던 김을동은, 이들 후배를 일컬어 "김을동 사단"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별칭이 아니라, 제자 육성에 성공한 멘토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은 것이었습니다.
아들 송일국의 배우 데뷔 뒷이야기
김을동은 아들 송일국이 배우의 길로 들어서는 데 적지 않은 심적 갈등을 겪었습니다. IMF 외환위기 시절 미국 유학 중이던 송일국이 귀국한 후, 유동근의 권유로 MBC 공채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고 합격했다는 소식을 받은 김을동은 "진짜 기절할 뻔 했다"고 나중에 고백했습니다.
초기에는 아들이 연기를 잘하지 못해서 'PD 기피증'이 생길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송일국은 드라마 '주몽'(2006년 MBC)에서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일약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처음에는 "후광효과"라는 지적이 많았지만, 김을동은 "아들이 캐스팅 과정에서 자신의 실력으로 그 자리를 얻었다"고 강조하며 아들을 옹호했습니다.
정치인으로서의 도정 및 의정 성과
정계 입문 전의 회의와 우연한 기회
김을동은 원래 정치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아버지 김두한이 정치하면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어린 시절부터 목격했기 때문에, 그녀는 정치를 "돈과는 거리가 먼 분야"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1995년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시의회 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당시 그녀는 동대문구 제3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서울시에서 최다득표를 기록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96년에는 제15대 국회의원 총선에 종로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2000년과 2004년 두 차례 더 지역구 출마로 도전했으나 연이어 낙선하게 됩니다.
첫 국회의원 당선과 '부녀 국회의원' 역사 달성 : 2008년 제18대 총선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김을동은 친박연대 비례대표 5번으로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하게 됩니다. 이는 매우 의미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김을동은 아버지 김두한에 이어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부녀 국회의원으로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당선 직후 김을동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가에 이바지하는 숙명을 타고 난 느낌입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손녀딸이 신통해서 이런 복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이 발언은 김을동이 개인적 성취보다는 가족의 역사와 사회적 책임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송파구 병 당선과 '야당의 성'을 뚫다 : 2012년 제19대 총선
2012년 제19대 총선은 김을동의 정치 활동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송파구 병 지역구는 24년 동안 민주당 후보자들만 당선되어 온 강력한 야당의 요새였기 때문입니다. 2011년 재보궐선거에서 박원순이 이 지역에서 강세를 보여 나경원 당시 서울시장 후보를 이기고 당선된 것도 이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김을동은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이 견고한 야당 지역구를 뚫고 당선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김을동의 오랜 정치 활동 경험, 문화예술인으로서의 대중적 신망, 그리고 역사 의식을 갖춘 정치인이라는 평가가 유권자들에게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당선 직후 김을동은 송파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다음 공약을 밝혔습니다:
"송파의 최대 현안인 가락동 중앙전파관리소 이전 문제를 4년 만에 해결했습니다. 3선 의원이 되어 송파를 문화예술 명품도시, 교육복지 선도도시로 만들겠습니다."
실제로 김을동은 송파에 첨단 ICT테크노밸리 조성을 주도하여 생산유발 10조 원, 부가가치 3조 원, 일자리 창출 4만여 개의 경제 효과를 창출했습니다. 또한 전국에서 6개 지역만 선정되는 '디자인융합벤처창업센터'를 송파에 유치하여 지역 청년 창업을 활성화하는 성과도 거두었습니다.
| 연도 | 선거 | 출마 지역/방식 | 정당 | 결과 |
|---|---|---|---|---|
| 1995년 |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서울 동대문구 제3선거구 (시의원) | 민주당 | 당선 (최다득표) |
| 1996년 | 제15대 총선 | 종로 | 민주당 | 낙선 |
| 2000년 | 제16대 총선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 자유민주연합 | 낙선 |
| 2004년 | 제17대 총선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 한나라당 | 낙선 |
| 2008년 | 제18대 총선 | 비례대표 | 친박연대 | 당선 (부녀 국회의원 첫 달성) |
| 2012년 | 제19대 총선 | 서울 송파구 병 | 새누리당 | 당선 (24년 만에 변수 지역 탈환) |
| 2016년 | 제20대 총선 | 서울 송파구 병 | 새누리당 | 낙선 |
의정 활동과 주요 입법 성과
한국사 교육 강화 : 역사 정체성의 수호
김을동이 추진한 가장 중요한 입법 사안 중 하나는 한국사 교육 강화 법안입니다. 이 법안은 청소년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고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것으로, 김을동의 조부 김좌진 장군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김을동은 국회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에서 "역사를 홀대하며 어찌 민족혼을 지키겠는가"라며 강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이는 한국 근현대사 교육의 약화를 우려하는 한 정치인의 간절한 호소이자, 동시에 독립운동가 가문의 후손으로서 역사 외면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는 메시지였습니다.
국가보훈처의 국가보훈부 승격 추진
김을동은 2012년 6월 국가보훈처를 국가보훈부로 승격시키기 위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이는 독립유공자와 순국선열에 대한 예우를 강화하고, 보훈 정책을 보다 중추적인 역할로 격상시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김을동은 이를 위해 2012년 6월 국가보훈처의 공청회를 개최하여 전문가, 유가족, 시민 의견을 수렴했습니다. 이 공청회에서 그녀는 "조부 김좌진 장군과 같은 선열들의 업적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기리기 위해서는 보훈 정책이 부처 급으로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및 재산환수 특별법
김을동의 가장 야심 찬 입법 성과 중 하나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대한 특별법입니다. 2012년 7월 3일 발의된 이 법안은 다음과 같은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 친일 인물들의 행위에 대한 체계적 규명
- 친일파의 불법적으로 취득한 재산의 국가 환수
- 역사 정의 실현과 민족 자존감 회복
김을동은 2011년 2월 국회에서 "친일파 재산은 기필코 환수하겠다"는 강한 입장을 천명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정책 주장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가문의 후손으로서 일제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역사적 책임감과 정의 추구의 표현이었습니다.
국방안보 관련 주요 입법 활동
김을동은 국가공무원법 개정 추진을 통해 군 면제자의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 임명을 제한하는 안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국방안보와 국가 지도자의 책임 의식을 강화하려는 취지였습니다.
또한 2011년 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을동은 SK커뮤니케이션즈의 개인정보 3,500만 건 해킹 사건의 원인을 정보보안 체계의 부실에 있다고 적절히 지적하여 전 국민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국정감사는 김을동을 "2011년 국감 우수 의원"으로 선정하게 했습니다.
문화와 정치의 이중성 : 예술가 정치인의 독특한 위치
배우로서의 경험이 정치인을 만들다
김을동은 "배우에서 정치인이 되는 과정"에서 많은 도전과 의심에 직면했습니다. 연예계 종사자들이 국회에 진출했을 때 자신의 전문 분야 밖에서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평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을동은 배우로서의 45년 경력이 정치인의 길에서 강력한 자산임을 증명했습니다. 문화예술인의 대표성을 가진 정치인으로서 문화산업 정책을 제시할 수 있었고, 대중과의 소통 능력으로 송파구 재선을 달성했으며, 무엇보다 "다양한 인생 경험을 통한 역사 감수성"을 갖춘 정치인으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문화예술 명품도시 송파 건설의 비전
김을동의 2012년 제19대 총선 공약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송파를 문화예술 명품도시로 만들겠다"는 구호였습니다. 이는 문화예술인 출신이자 유일한 정치인으로서 김을동의 전문성을 살린 공약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선 직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문화는 부가가치가 무한한 미래의 주요 먹거리 산업입니다. 송파구가 진정한 강남 3구 수준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역 곳곳에 문화예술이 수혈되어야 합니다. 문화로서 발전하고, 문화로서 삶의 품격을 더하는 송파를 완성시켜 송파구민들의 위상과 자긍심을 높여드리고 싶습니다."
이 발언은 김을동이 단순한 지역구 이익만 추구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문화의 가치를 이해하는 전문가 정치인임을 보여줍니다.
백야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상임이사장으로서의 역할
조부의 업적을 기리는 일생의 사명
김을동은 백야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상임이사장으로서 조부의 독립운동 업적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활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이 역할은 정치 활동 이상으로 김을동의 인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김을동은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사실 내가 기념사업회를 하면서 월세방 신세를 지면서 어려운 시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선대의 희생이 지금을 있게 한 것으로 생각하고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는 김을동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조부의 기념사업에 헌신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조부 생가 복원 및 국제적 기념사업
김을동은 조부 김좌진 장군의 생가를 복원했으며, 중국에 한중우의공원을 세워 조부의 업적을 국제적으로 기리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추모 활동을 넘어 역사 정의 구현과 한중 우호 관계 강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활동입니다.
2024년 8월에는 국민의힘이 제시한 김좌진 장군의 공산주의 연계 주장에 강력하게 반박하면서, 김을동은 "할아버지는 공산당원에게 암살당했는데 어떻게 공산주의와 연계되었는가"라며 역사적 왜곡에 저항했습니다. 이는 김을동의 역사 의식이 얼마나 깊고 확고한지를 입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가족 확대와 세 세대에 걸친 공적의 계승
배우 송일국과 판사 부인의 만남 : '명문가' 이미지 강화
김을동의 아들 송일국은 드라마 '주몽'(2006년 MBC)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하면서 한류 인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습니다. 2008년 송일국이 법조인 정승연과의 결혼을 발표했을 때, 세간의 관심은 매우 높았습니다.
송일국의 배우자는 현재 인천지방법원 판사로 재직 중이며, 이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독립운동가-정치인-배우-판사"로 이어지는 최고의 사회 지도층 가문의 이미지를 강화했습니다.
세 쌍둥이 대한·민국·만세의 탄생 : 가족사의 새로운 장
송일국과 정승연 부부는 2012년 세 쌍둥이 아들들을 낳게 됩니다। 아이들의 이름인 '대한(大韓)', '민국(民國)', '만세(萬歲)'는 김을동이 손주들에게 역사와 애국심을 담아 지어준 이름으로, 가족의 역사 의식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세 쌍둥이는 2014년 SBS 예능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면서 전국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김을동은 손주 세대까지 한국 대중문화의 대표 가족이 되었으며, 동시에 가족 전체가 "역사 의식을 갖춘 명문가"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인명사전 4대 등재 : 한국 근현대사 상징의 완성
"4대가 대한민국 인명사전에 모두 등재된 집안은 거의 없을 것"
김을동이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가족 기록은 바로 "4대가 모두 대한민국 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한국사에서 거의 전례를 찾기 어려운 영예로, 다음과 같이 구성됩니다:
- 제1대 : 조부 김좌진 (1889-1930) - 청산리 대첩 영웅, 독립운동가
- 제2대 : 부친 김두한 (1914-1972) - 야인시대 주인공, 정치깡패에서 국회의원으로의 인생
- 제3대 : 김을동 (1945-) - 배우, 정치인, 보훈사업가
- 제4대 : 아들 송일국 (1977-) - 드라마 주몽의 주인공, 최고의 배우
김을동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나, 아들까지 모두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 나왔는데 이것도 아마 진기록일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자부심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각 세대가 보여준 개인적 성취가 결과적으로 역사적 기록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가족사를 통해 본 대한민국 현대사
김을동의 가족사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 근현대사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조부 김좌진 : 일제강점기 무장독립투쟁의 정점(청산리 대첩) →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암살로 순국
- 부친 김두한 : 해방 전후 혼란 속에서 우익 청년 지도자에서 정치인으로 → 논쟁 많은 정치 활동
- 김을동 : 전후세대 표본으로서 예술 활동 → 부녀 국회의원 첫 달성 → 역사 의식 높은 정치인
- 아들 송일국 : 한류 배우로서 국제적 명성 → 안정적 사회인으로서의 삶
각 세대는 자신의 시대적 요청에 응하면서도 가족의 역사 의식과 애국심을 계승해 왔으며, 이는 김을동이 정치 활동에서 한국사 교육과 보훈 정책을 중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론 : 역사의 증인이자 미래의 지도자
김을동은 단순한 배우도, 평범한 정치인도 아닙니다. 그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서 현대한국의 정치까지 연결되는 한국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며, 동시에 다음 세대를 위해 역사 의식을 전승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특히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부녀 국회의원으로 기록되고,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24년 야당 지역인 송파구에서 당선되었으며, 한국사 교육, 보훈 정책, 친일재산 환수 등 역사 정의 관련 입법을 주도한 김을동의 정치 활동은 단순한 지역 이익 추구가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과 미래를 위한 전략적 성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인명사전에 4대가 등재된 가문이라는 사실은 김을동이 개인적으로 이루어낸 성취보다는, 각 세대가 자신의 시대 속에서 역사적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김을동과 그 가족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갖는 진정한 의미이자, 미래 세대가 배워야 할 역사의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