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고려시대는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2성 6부의 중앙 관제를 정비하면서도, 고려만의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식목도감(式目都監)이라는 두 개의 회의 기관입니다. 도병마사는 대외적인 국방과 군사 문제를 관장했고, 식목도감은 대내적인 법제와 격식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이 두 기관은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핵심적인 정치 기구였습니다. 이들 기관은 중국의 당나라나 송나라, 그리고 신라나 태봉의 관제에서 기원하지 않은 순수한 고려의 독자적인 정치 기구로서, 고려 왕조의 정치적 독창성을 대변하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였습니다.
도병마사의 설립과 발전
도병마사는 989년(성종 8년)에 설치된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의 판사제(判事制)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려 성종 대에 재상들이 모여 변경의 군사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병마사제를 활용하여 조직 체제를 갖춘 회의 기관으로 발전했습니다. 1010년(현종 1년)과 1011년(현종 2년)에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의 임명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1015년(현종 6년)에는 '도병마사주(都兵馬使奏)'라는 기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성종 대에 도병마사 제도가 마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활동은 992년(성종 11년) 요나라의 침입 때 특히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이 시기 변경의 군사 문제를 다루는 핵심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도병마사는 도당(都堂)이라고도 불렸으며, 고려시대 3성(三省)과 중추원(中樞院)의 고관들이 함께 모여 국가의 중대사를 회의로 결정짓던 임시 기관으로 출발했습니다. 처음에는 국방에 관한 문제를 주로 다루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국정 일반에 관한 합좌기관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합좌기관의 존재는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것으로, 왕권과 귀족 세력 간의 권력 균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였습니다.
도병마사의 구성과 조직
도병마사의 구성은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 도평의사사조에 문종(文宗) 때의 관제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병마사의 최고직인 판사(判事)는 중서문하성의 5재(五宰), 즉 시중(侍中), 평장사(平章事), 참지정사(參知政事), 정당문학(政堂文學),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구성되었습니다. 다음 직급인 사(使)는 중추원의 6추밀(樞密) 및 직사 3품 이상이 임명되었는데, 이는 도병마사의 중요 임원인 판사와 사가 중서문하성의 재신(宰臣)과 중추원의 추밀, 즉 재추양부(宰樞兩府)로 충당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외에도 정4품 이상의 경(卿), 감(監), 시랑(侍郞)이 임명된 부사(副使)와 소경(少卿) 이하가 임명된 판관(判官)이 있었으며, 이들 판관 이상이 도병마사에서 변경의 군사 문제에 대한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회의원의 구성을 살펴보면, 재상급 인사들로 구성된 판사와 사, 그리고 중견 관료들로 구성된 부사와 판관이 함께 참여하여 의사결정을 내리는 합의제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이러한 구성 방식은 고려 귀족 정치의 합의제적 성격을 잘 보여주며, 특정 개인이나 세력이 독단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였습니다. 도병마사의 사무를 담당하는 녹사(錄事)도 배치되어 회의 내용을 기록하고 행정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도병마사의 기능과 역할
도병마사의 주요 기능은 변경의 군사 문제를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양계(兩界)에 있어서의 축성(築城), 둔전(屯田), 국경 문제, 그리고 장졸(將卒)에 대한 상벌, 주(州)와 진민(鎭民)에 대한 진휼(賑恤) 등 변경, 군사, 대외 문제를 다루는 회의 기관의 구실을 했습니다. 병부(兵部)나 양계의 병마사가 군공(軍功)에 대한 포상을 발의하면 도병마사가 이를 총괄 검토하여 국왕에게 상주(上奏)했기 때문에 군공 포상도 도병마사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도병마사가 민생 문제에도 관여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양계민(兩界民)의 생활 문제를 의논했으나, 점차 준변경지방으로 확대되었고, 고려 중기에는 전국 인민의 기근과 빈곤을 구휼하는 방법까지 의논하는 등 기능이 군사적인 문제에서 민사적인 문제로 차차 확대되어갔습니다. 이는 도병마사가 단순한 군사 회의 기관을 넘어 국정 전반을 다루는 종합적인 정책 협의 기관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줍니다.
도병마사의 변질과 도평의사사로의 개편
1170년(의종 24년) 무신정변 이후 한동안 도병마사의 활동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신들의 집권으로 정치, 군사권이 집정부(執政府)와 중방(重房)에 귀속되어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종(高宗) 말년에 이르러 도병마사는 다시 활동을 재개했으며, 이때부터 기능이 크게 변질되었습니다.
고종 말년에는 도병마사를 도당(都堂)이라 칭하고, 양부재추(兩府宰樞)들이 합좌하여 국가의 대사를 회의하고 결정했습니다. 종래에는 재추가 판사와 사에 임명되고 부사와 판관도 회의원을 구성했는데, 이제는 부사와 판관은 없어지고 양부재추의 전원만 합좌 회의하게 되었습니다. 기능도 전기에는 국방 및 군사 관계에 한정되었으나, 고종 이후 국사(國事) 전반에 걸쳐 확대되었습니다. 이러한 변질은 도병마사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개칭하게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1279년(충렬왕 5년) 도병마사는 도평의사사로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원래 고려는 1275년(충렬왕 1년) 원나라의 간섭으로 모든 관제를 개편하고 관직명을 바꾸었지만, 도병마사만은 그대로 존속하다가 4년 뒤인 1279년에 가서야 도평의사사로 개칭되었습니다. 이는 도병마사가 고려의 독특한 기구이므로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 개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으며, 도병마사의 개칭은 원나라에 대해 굴종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려 자신의 필요에서 실시된 것이었습니다. 즉, 도병마사를 도평의사사로 개칭한 것은 구성과 기능의 확대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식목도감의 설립과 성격
식목도감은 고려시대의 법제 회의 기관으로, 도병마사와 함께 고려의 독자적인 정치 기구였습니다. 식목도감의 창설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중앙 관제가 성립한 뒤인 성종(成宗) 말과 현종(顯宗) 초에 걸쳐 설치되어 적어도 1023년(현종 14년)에는 그 기능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고려는 당제(唐制)를 모방하여 2성 6부의 중앙 관제를 정비하면서 별도로 독자적인 두 개의 회의 기관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대외적인 국방과 군사 문제를 관장하는 도병마사이고, 또 하나는 대내적인 법제와 격식을 관장하는 식목도감이었습니다.
식목도감의 명칭에 있어서 식목(式目)은 입법을 의미하고, 도감(都監)은 특정한 일을 한시적으로 담당한 관아를 뜻합니다. 인종 때 식목도감이 왕명을 받아 학교와 과거제 개혁 정책에 부응해서 학칙과 학규를 제정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식목도감은 법규 관련 사무를 처리하기 위한 임시 기구로 설치되어 법규를 제정하고 이를 관리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러한 법제 기능은 도병마사의 군사 기능과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며 고려 국정의 양대 축을 이루었습니다.
식목도감의 구성과 조직
『고려사』 백관지에 기록된 문종 때 관제의 구성원을 보면, 식목도감은 성재(省宰)로 임명된 사(使) 2명, 정3품 이상의 부사(副使) 4명, 5품 이상의 판관(判官) 6명으로 도합 12명이 있었고, 그 밑에 사무직인 녹사(錄事) 8명이 딸려 있었습니다. 실제로 수상(首相)이 대표로서 사가 되고, 3품직을 겸한 추신(樞臣)이 부사가 되어 재추(宰樞)가 주요 구성원을 이루었으며, 판관도 확대 회의에 참가했는데, 이는 도병마사의 인원 구성과 동일했습니다.
구성이 법제를 제정하는 회의 기관이기 때문에 그 관원은 타직으로 임명된 회의원의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관례적으로 수상이 식목도감의 사가 되고 추밀원의 추사가 부사가 되었습니다. 소관사 논의 때에는 사, 부사가 참여하여 합의로 결정했는데, 때로는 판관도 회의에 참여했습니다. 식목도감 녹사는 다른 녹사에 비해 권위가 높았고, 출세에도 매우 유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식목도감이 단순한 행정 기관이 아니라 고려 정치의 핵심 기구였음을 보여줍니다.
식목도감의 기능과 역할
식목도감의 기능은 '식목(式目)'의 명칭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제도와 격식을 의논하고 결정하여 상주(上奏)하는 회의 기관으로, 그것을 직접 집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중요 안건은 회의원의 합좌 회의에서 의결되었고, 그 결정 사항은 대표인 식목도감사(수상)에 의해 국왕에게 상주되었습니다. 또한 제정된 제도와 격식에 대한 자료를 보관했는데, 그것은 『식목편수록(式目編修錄)』에 수록되었습니다.
특히 식목도감은 관리 등용에 있어서 엄격한 신분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귀족 정치기에 문신 귀족의 세력 기관으로서 엄격한 신분 격식의 유지를 기도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식목도감은 법규를 제정하고 이를 관리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고려 사회의 신분 질서와 법적 체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러한 법제 기능은 도병마사의 군사 및 행정 기능과 더불어 고려 국정 운영의 양대 기둥을 형성했습니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의 관계
고려의 독자적인 회의 기관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같은 양부재추(兩府宰樞)로 조직된 합좌 회의이며, 같은 금내관(禁內官)으로서 병렬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도병마사에서도 대내 문제를 의논하고, 식목도감에서도 대외 문제를 발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직이나 구성상으로 보아 도병마사가 우위에 있었고, 이는 장차 도병마사가 도당(都堂)으로 대두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두 기관은 정치의 부침에 따라 경쟁 관계 속에서 관장 업무가 변화하면서 국정 최고 회의 기관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도병마사는 고종 때부터 도당으로 불리면서 종래의 대외적인 국방 문제를 넘어서 모든 국정의 중심 기구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러한 도병마사의 기능 확대는 식목도감으로 하여금 종속적 지위로 격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충렬왕 때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개편되어 그 기능과 구성이 확대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식목도감의 기능은 침탈되었고, 식목녹사 중심의 무력 기구로 전락하여 판안(判案)의 소장이나 맡는 기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식목도감의 변천과 소멸
1310년(충선왕 2년) 식목도감의 지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일대 개혁이 단행되었습니다. 즉, 식목도감으로 하여금 방국(邦國)의 중사를 관장하고, 첨의평리(僉議評理) 이상을 판사, 지밀직(知密直) 이하를 사로 삼게 했습니다. 이는 충선왕이 대립적인 충렬왕파의 구세력을 산제(刪除)하기 위해 단행한 것으로, 종래의 도평의사사 대신 식목도감을 도당으로 삼아 새로운 권력 기구로 개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도평의사사를 대신하여 도당이 되고 국가의 중대사를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충혜왕 때에 다시 도평의사사가 도당의 지위로 환원되면서 종전과 같은 무력 기구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고려 후기에도 식목도감이라는 기구가 존재했지만 그 기능은 보잘것없었습니다. 다만 식목녹사가 부정 관리에 대한 탄핵, 특히 대간(臺諫)에 대한 탄핵을 담당한 것이 특징이고, 재추의 합좌 기능은 무력했습니다. 고려 말의 식목도감은 조선 초까지 계속되다가 태종 때 의정부에 흡수되었습니다. 1412년(태종 12년)에 식목녹사가 의정부안독녹사(案牘錄事)로 바뀌어 의정부에 완전히 흡수되면서 식목도감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두 기관의 역사적 의의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당나라, 송나라나 신라, 태봉의 관제에 기원하지 않은 고려 독자적인 정치 기구였습니다. 이 두 기관은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제도적 장치로서, 왕권과 귀족 세력 간의 권력 균형을 제도적으로 구현한 것이었습니다. 도병마사는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 인해 임시 군사 기관에서 국정을 총괄하는 상설 기관으로 변모하여 왕권을 견제하고 귀족 정치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비변사와 비교됩니다.
고려시대는 거란, 여진, 몽골 등 이민족과의 전쟁이 많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군사와 관련된 문제는 더욱 중요했으며, 도병마사는 이러한 국방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핵심 기관으로 기능했습니다. 식목도감은 법제와 격식을 제정하고 관리함으로써 고려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처럼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고려 왕조의 정치 운영에 있어서 군사와 법제라는 두 개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며, 고려 정치의 독자성과 합의제적 성격을 대변하는 핵심적인 제도였습니다.
결론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고려시대 귀족 정치를 대표하는 양대 회의 기관으로서,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면서도 고려만의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도병마사는 군사와 국방 문제를 다루다가 점차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최고 회의 기관으로 발전했으며, 식목도감은 법제와 격식을 제정하고 관리하는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이 두 기관은 재추양부의 고관들로 구성된 합좌 회의 기관으로서 고려 귀족 정치의 합의제적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도병마사는 후에 도평의사사로 개편되어 고려 후기의 최고 정무 기관이 되었고, 식목도감은 고려 말기에 무력화되어 조선 초기 의정부에 흡수되었습니다. 이러한 제도의 변천은 고려 정치사의 흐름과 맞물려 있으며, 귀족 정치에서 왕권 강화로의 이행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비록 조선시대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고려 왕조 500년 동안 국정 운영의 핵심 기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 정치사에 독특한 족적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