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의 의미와 정의
만파식적은 '萬波息笛'으로 표기되며, 세상의 온갖 파란(萬波)을 없애고 평안하게(息) 하는 피리(笛)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적(笛)'은 피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줄여서 '만파식'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왕실에서 정치적 불안이나 국난이 진정되고 태평성대가 오기를 염원하는 제례에 사용했던 신비로운 악기로, 신라의 제31대 왕인 신문왕 시기에 처음 등장한 전설적인 보물입니다.
만파식적은 단순한 악기를 넘어서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해결하는 신통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가 들면 날이 개며, 바람이 잔잔해지고 물결이 평온해진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영험한 힘 때문에 만파식적은 신라의 국보로 지정되어 월성의 천존고에 소중히 보관되었습니다.
만파식적 설화의 유래와 전설
만파식적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 권2 기이 만파식적조와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1 악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설화는 신라 신문왕이 신성 징표를 획득하는 신비체험에 관한 이야기로, 통일 직후 신라의 종교, 사상, 정치, 음악 등을 함축하는 중요한 문화 기호입니다.
신문왕은 즉위 후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와 가까운 곳에 감은사를 지었습니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짓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인 682년에 완성한 절입니다. 특별히 금당 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뚫어 두었는데, 이는 용이 된 문무왕이 절에 들어와 돌아다닐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문왕 2년(682년) 5월 초하루에 해관 파진찬 박숙청이 "동해 안에 있는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일관 김춘질에게 점을 치게 하니,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시어 삼한을 진호하시고, 김유신 공도 33천의 한 아들로서 지금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나라를 지키는 보물을 내려 주시려 하니, 해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큰 보물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아뢰었습니다.
삼국유사의 상세한 기록
신문왕은 그 달 7일에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산의 형상은 거북의 머리와 같았고 그 위에는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자가 돌아와 사실대로 아뢰니, 왕은 감은사로 가서 유숙하였습니다.
이튿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쳐져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어둑컴컴해지더니 7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달 16일에 이르러서야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졌습니다. 왕은 배를 타고 바다에 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받들어 왕에게 바쳤습니다.
왕은 용과 함께 앉으면서 물었습니다.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니 무슨 까닭이냐?" 용이 대답하였습니다. "비유해 말씀드리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만 소리가 나게 되므로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용은 계속해서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셔서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 같은 큰 보물을 저에게 주시어 저로 하여금 그것을 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몹시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과 옥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습니다. 그때 산과 용은 문득 없어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왕은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간직해 두었습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 올 때는 비가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지므로,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습니다.
만파식적의 상징적 의미와 왕권 강화
만파식적은 악기로서 단군신화의 천부인, 진평왕의 천사옥대, 이성계의 금척 등과 같이 건국할 때마다 거듭 나타난 신성한 물건과 비슷한 성격을 지닙니다. 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에 이어서 즉위한 신문왕은 정치적 힘의 결핍과 일본의 침입이라는 문제를 타결하기 위하여 지배층의 정통성과 동질성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강력한 왕권을 상징할 수 있는 신물을 등장시키기 위해 이러한 신화를 만들었으리라고 추측됩니다. 만파식적 설화는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룩한 아버지 문무왕과 김유신을 등장시켜 왕권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신물설화로, 신문왕이 왕권을 신성시하여 강화하기 위한 정책이 만파식적과 같은 설화로 표현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파식적 설화에서 주목할 점은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린다'는 개념입니다. 피리는 깊숙이 숨을 불어넣어야 소리가 나고, 귀를 기울일 때만 들리는 연약한 악기입니다. 이는 권력과 폭력으로는 국민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고, 상대방의 귀(마음)를 얻지 않고서는 화합할 수 없다는 신라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설화입니다. 만파식적이 피리라는 점에서 예악을 중시하는 유교 이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통일된 신라의 새로운 음악 체계가 발생하는 과정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효소왕 시대의 만만파파식적
만파식적은 신문왕 이후에도 계속해서 신라 왕실의 중요한 보물로 여겨졌습니다. 신문왕의 아들인 효소왕 때에는 특별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효소왕 시기에 만파식적이 분실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찾는 과정에서 말갈족에게 납치된 화랑 부례랑을 되찾아오는 등의 이적이 거듭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일들이 계속되자, 만파식적의 이름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으로 격을 높여 개명하였습니다. '만파'를 두 번 반복하여 '만만파파'로 한 것은 그 영험함이 더욱 배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후 효양의 가문이 대대로 만파식적을 보관하다가 아들 김경신에게 물려주었고, 김경신은 후에 원성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원성왕 때에는 일본이 2차례에 걸쳐 만파식적을 빼앗으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이에 왕은 더 깊은 창고에 숨기도록 명하였습니다. 일본 사신이 천 냥을 내고 한 번 보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며, 이는 만파식적이 특히 대일본 전용 결전병기로서 일본의 침략을 막는 효능이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현존 유물과 보관의 역사
만파식적은 오늘날 현존하지 않으며, 전설과 관련된 유물도 명확히 확인되지 않아 실존하는 물건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아마도 박혁거세의 금척처럼 왕조의 훌륭한 통치를 비유하는 상징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경주에는 만파식적으로 여겨지는 옥피리가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가 멸망하면서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만파식적을 바쳤다가, 고려 광종 때 경주에 객사 동경관을 새로 지으면서 이 건물로 옮겨 보관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동경관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이 피리도 불에 타 세 조각으로 깨졌는데, 이것을 납으로 땜질하고 그 위에 은테를 둘러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 연산군 때인 1499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도 이 옥피리에 대한 기록이 나타납니다.
임진왜란 때 경주 관아가 쑥대밭이 되면서 옥피리는 다시 없어졌습니다. 그 후 광해군 때의 경주 부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옛 것을 모방하여 새로이 만들었습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두 점의 옥피리가 소장되어 있는데, 하나는 검은색 옥피리이고 다른 하나는 연두색 옥피리입니다. 이 옥피리들은 지금의 대금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취공(바람을 불어 넣는 구멍), 청공(떨리는 소리가 나는 구멍), 지공(손가락으로 막아 음률을 만드는 구멍)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이 옥피리를 신라의 보물, 즉 만파식적으로 여겼습니다. 한문건(1765~1850)은 "고려 태조가 이 옥피리를 갖고 싶어 했으나 조령을 넘자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하여 신라에 대한 충절을 나타내는 기물로 여겼습니다. 특이하게도 조령을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것은 만파식적이 신라 밖으로 넘어가지 않으려는 정절의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발굴한 유물을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보관·관리하기 위해 출토유물열람센터를 건립하고, 『삼국유사』에 만파식적과 가야금을 보관하던 천존고의 이름을 살려 '천존고(天尊庫)'라고 명명하였습니다. 2018년 5월 16일에 준공된 이 천존고는 신라 왕실 보물창고의 전통을 현대에 되살린 것으로, 신라 유물 보관의 상징적 공간이 되었습니다.
문화적·역사적 가치와 의의
만파식적은 신라의 평화와 안정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 시대의 문화적, 정신적 가치를 잘 보여주는 유산입니다. 이 설화는 단순한 전설을 넘어, 한국인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염원, 그리고 신라의 문화적 자부심을 담고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대금의 원류에 관한 이야기로 만파식적 설화를 간단히 소개하였으나, 김부식은 사견으로 "이러한 설이 있으나 괴이하여 믿지 못하겠다"고 부연하였습니다. 김부식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설화적 기록은 배제하려는 괴력난신 불어부작의 원칙을 견지했기 때문에, 악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언급은 했지만 비판적 입장을 취한 것입니다.
만파식적 설화는 감은사지가 있던 곳에서 종소리 또는 물 끓는 소리가 난다는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지형적 특수성과 기상 변화에 기인해서 나는 소리로, 만파식적의 소리로 왜적을 물리쳤다는 등의 이적이 이러한 자연현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만파식적은 대금(大笒)의 기원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신라시대부터 대금, 중금, 소금의 삼죽이 있었음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만파식적 설화는 대금이라는 악기가 신라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대금의 기원과 관련해서 신라 신문왕의 만파식적 설화가 가장 유명하며, 동해의 신비로운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신문왕이 불자 나라의 근심과 재난이 사라졌다는 이 설화는 대금이 단순한 악기를 넘어 평화와 통합, 신성의 상징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줍니다.
현대적 의의와 전승
오늘날 만파식적은 신라의 문화적 유산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경주 삼기팔괴 중 삼기의 하나로 만파식적을 꼽으며, 만파식적을 소재로 한 창작 동요도 있습니다. 현대 대중문화에서도 만파식적은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어, 영화 『전우치』에서 중요한 아이템으로 등장하였고,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에서는 평행우주와 시공간을 넘나들 수 있게 해주는 신적인 물건으로 그려졌습니다.
만파식적 설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세상의 온갖 파란과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고자 하는 염원, 소리와 음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화합을 이루려는 지혜는 현대 사회에도 필요한 가치입니다. 만파식적은 단순한 전설 속 악기가 아니라, 평화와 조화를 추구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는 문화적 상징으로서 그 의미가 계승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