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미리엄 마케바 : Miriam Makeba, 아프리카의 어머니이자 세계적 인권 투사

by jisiktalk 2025. 9. 3.

미리엄 마케바(Miriam Makeba, 1932-2008)는 단순한 가수를 넘어 20세기 후반 인권 운동의 상징이자 아프리카 문화를 세계에 알린 문화 대사였다. '마마 아프리카(Mama Africa)'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은 그녀의 삶은 예술과 정치, 개인적 고통과 공적 헌신이 교차하는 드라마틱한 여정이었다.

어려운 시작과 음악적 재능의 발견

젠질 미리엄 마케바(Zenzile Miriam Makeba)는 1932년 3월 4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근교의 프로스펙트 타운십에서 태어났다. 스와지족 어머니와 코사족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의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태어난 지 불과 18일 만에 어머니가 집에서 맥주를 빚어 팔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감옥에서 지내야 했고, 5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미리엄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녀의 음악적 재능은 일찍부터 발견되었다. 킬너턴 칼리지의 감리교 초등학교에서 합창단 활동을 시작했고, 13세 때 조지 6세 국왕을 위한 고등학교 합창단의 첫 독창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17세에 학교 동창인 제임스 "굴리" 쿠베이와 결혼했지만, 이는 학대가 있는 불행한 결혼이었다. 1950년 딸 본지(Bongi)를 낳은 후 유방암을 이겨내야 했고, 결국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2년 후 이혼하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홀로 딸을 키우며 가사도우미로 일하면서 결혼식, 장례식 등에서 노래를 불러 생계를 유지했다.

음악 경력의 시작과 국제적 명성

맨해튼 브라더스와의 만남

1954년, 22세의 미리엄 마케바는 남아프리카의 인기 재즈 그룹인 맨해튼 브라더스(Manhattan Brothers)의 여성 보컬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때 그녀의 대표곡 중 하나인 "Pata Pata"를 처음 녹음했다. 이 그룹과 함께 남아프리카, 로디지아(현 짐바브웨), 벨기에령 콩고 등을 순회 공연하며 명성을 쌓아갔다.

1957년 맨해튼 브라더스를 떠난 후에는 여성들로만 구성된 그룹 스카이라크스(Skylarks)에 합류했다. 이 그룹에서 재즈와 전통 아프리카 선율을 결합한 독특한 음악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국제적 돌파구: 《컴 백, 아프리카》

미리엄 마케바의 국제적 명성은 1959년 아메리카 영화감독 라이오넬 로고신이 제작한 반아파르트헤이트 다큐멘터리 영화 《컴 백, 아프리카(Come Back, Africa)》에 출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세베인 가수로 출연하여 "Lakutshon Ilanga"와 "Saduva" 등을 불렀다.

영화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비평가상을 수상하면서 마케바도 함께 베니스로 초청받았다. 이후 런던에서 공연하던 중 미국의 유명한 흑인 가수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를 만나게 되었고, 이는 그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미국에서의 성공과 정치적 각성

해리 벨라폰테와의 협력

벨라폰테의 도움으로 1959년 11월 미국에 입국한 마케바는 곧바로 《스티브 앨런 쇼》에 출연하며 미국 데뷔를 했다. 1960년 RCA 빅터와 계약을 맺고 첫 솔로 앨범 《Miriam Makeba》를 발매했다.

1965년에는 벨라폰테와 함께 제작한 앨범 《An Evening with Belafonte/Makeba》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포크 레코딩 부문을 수상했다. 이는 아프리카 출신 가수로서는 최초의 그래미상 수상이었다.

고국으로의 귀국 금지

1960년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로 돌아가려 했던 마케바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남아프리카 정부가 그녀의 여권을 취소했던 것이다. 《컴 백, 아프리카》 출연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의 실상이 알려진 것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1963년 유엔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관한 증언을 한 후, 남아프리카 정부는 더 나아가 그녀의 시민권까지 박탈하고 음반 유통을 금지했다. 이로써 마케바는 30여 년간 조국에 발을 들일 수 없는 망명객이 되었다.

대표곡들과 음악적 성취

"Pata Pata"의 세계적 히트

1967년 재발매된 "Pata Pata"는 미리엄 마케바를 세계적 스타로 만든 결정적 작품이었다. 미국 빌보드 차트 12위까지 오르며 대히트를 기록했고, 베네수엘라에서는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Pata Pata"는 "터치 터치"라는 뜻으로, 요하네스버그에서 인기였던 춤의 이름이기도 했다.

기타 대표곡들

  • "The Click Song": 코사어의 설음(클릭음)을 활용한 독특한 곡으로 서구 청중들에게 아프리카 언어의 특징을 알렸다
  • "Malaika":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사랑받는 곡으로, 지참금이 없어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야 하는 애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
  • "Soweto Blues": 1976년 소웨토 항쟁을 다룬 곡으로, 전 남편 휴 마세켈라가 작곡했다

인권 운동가로서의 활동

유엔에서의 증언

미리엄 마케바는 단순한 가수가 아니라 적극적인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였다. 1962년과 1964년 두 차례에 걸쳐 유엔에서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해 증언했다. 그녀의 증언은 국제사회가 아파르트헤이트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6년에는 유엔 주재 기니 대표가 되어 다시 한 번 유엔에서 인종차별 철폐를 주장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다그 하마슐드 평화상을, 2001년에는 오토 한 평화상을 수상했다.

스토클리 카마이클과의 결혼

1968년 미리엄 마케바는 미국의 급진적 흑인 민권 운동가이자 블랙 팬서당 지도자인 스토클리 카마이클과 결혼했다. 카마이클은 "블랙 파워" 운동의 핵심 인물로,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 의장을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결혼은 마케바에게 새로운 시련을 안겨주었다. 미국 정부는 카마이클과의 결혼을 문제 삼아 그녀의 비자를 취소하고 음반 계약과 공연을 취소시켰다. 백인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지지를 잃게 되었다. 결국 부부는 1973년 이혼했지만, 미국에서의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기니에서의 망명 생활

아프리카로의 복귀

미국에서 활동이 어려워진 마케바와 카마이클은 기니로 이주했다. 기니의 초대 대통령 세쿠 투레의 초청을 받아 정착한 그녀는 이곳에서 아프리카 각국의 독립 기념식과 각종 행사에서 공연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동안 그녀는 유럽, 남미, 아프리카 등지에서 활발한 공연 활동을 펼쳤다. 비록 미국의 대형 콘서트홀이나 유명 방송사 출연은 어려웠지만, 노동조합 회관, 문화기관, 재즈 페스티벌 등에서 꾸준히 공연을 이어갔다.

개인적 시련들

1980년대는 마케바에게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였다. 카마이클과 별거하게 되었고, 딸 본지가 비극적인 사고로 사망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서 딸의 장례비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알코올 중독과 자궁경부암과도 싸워야 했다.

폴 사이먼과의 협력과 재기

1987년 미국의 포크 가수 폴 사이먼(Paul Simon)그레이스랜드 투어에 참여하면서 마케바는 다시 국제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투어는 남아프리카의 문화적 보이콧을 기술적으로 위반하는 것이었지만, 아프리카 음악을 세계에 알리고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레이스랜드 투어 이후 마케바는 다시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각국 정상들과 교황 앞에서도 공연할 기회를 얻었다.

조국으로의 귀환

넬슨 만델라의 석방과 귀국

1990년 넬슨 만델라가 27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석방되면서 남아프리카의 정치적 상황이 급변했다. 만델라는 마케바에게 조국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했고, 1990년 6월 11일 31년간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남아프리카로 귀국했다.

귀국 당시 수많은 동포들이 공항에 나와 그녀를 열렬히 환영했다. 마케바는 "나는 내 뿌리로부터의 음악을 지켰다. 음악으로 나는 아프리카의 목소리가 되고 이미지가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유엔 친선대사 활동

1999년 유엔 친선대사로 임명된 마케바는 인도적 차원의 캠페인 활동을 펼쳤다. 또한 1992년 영화 《사라피나!》에 출연하여 소웨토 항쟁을 다룬 작품에 참여하기도 했다.

마지막 무대와 죽음

2008년 11월 9일(현지시간 11월 10일), 76세의 미리엄 마케바는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 카스텔 볼투르노에서 열린 자선 공연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마피아 조직 카모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고 있던 논픽션 작가 로베르토 사비아노를 지지하는 공연에서 30분간 노래를 부른 직후 쓰러진 것이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의를 위해 노래했던 그녀의 죽음은 전 세계에 깊은 애도를 불러일으켰다. 넬슨 만델라는 성명을 통해 "사랑하는 미리엄의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의 음악은 우리 모두에게 강력한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애도했다.

음악적 유산과 영향

아프리카 음악의 세계화

미리엄 마케바는 최초로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아프리카 음악가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서구 청중들에게 아프리카 음악을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월드 뮤직아프로팝 장르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녀의 음악은 재즈, 전통 아프리카 음악, 서구 대중음악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것이었다. 특히 코사어의 설음(클릭음)을 활용한 "Click Song" 같은 곡들은 서구인들에게 아프리카 언어와 문화의 독특함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후세대 아프리카 음악가들에게 미친 영향

마케바의 성공은 이후 수많은 아프리카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녀가 열어놓은 길을 따라 요수 은도르, 안젤리크 키조, 살리프 케이타 등 많은 아프리카 음악가들이 세계 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다.

특히 베냉 출신의 가수 안젤리크 키조는 마케바를 롤모델로 삼고 있으며, 2020년에는 유니세프와 함께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Pata Pata"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인권 운동가로서의 유산

문화를 통한 저항의 상징

미리엄 마케바는 문화를 통한 정치적 저항의 대표적 사례였다. 그녀는 직접적인 정치 활동보다는 음악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의 부당함을 알리고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어냈다. 이는 예술가가 사회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임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노래들, 특히 "Meadowlands"나 "Ndodemnyama we Verwoerd" 같은 반아파르트헤이트 곡들은 남아프리카 내에서 금지되었지만 지하에서 널리 퍼져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범아프리카주의와 연대

마케바는 남아프리카만이 아니라 범아프리카적 연대를 추구했다. 그녀는 "아프리카 어디에서 살든 아프리카인들은 어디서든 투쟁해야 한다. 남아프리카에서든, 시카고 거리에서든, 트리니다드에서든, 캐나다에서든 투쟁은 다르지 않다. 흑인들은 자본주의, 인종주의, 억압의 희생자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그녀의 사상은 1960년대 미국의 민권 운동블랙 파워 운동과도 연결되었다. 스토클리 카마이클과의 결혼은 단순한 개인적 결합이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흑인들 간의 상징적 연대였다.

현대적 의미와 재평가

여성 인권운동가로서의 재조명

미리엄 마케바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이라는 이중적 억압에 맞선 선구적 인물이었다. 1960년대 당시 여성, 특히 유색인 여성이 국제 무대에서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녀의 활동은 후에 흑인 페미니즘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학자 루스 펠드스타인은 마케바와 니나 시몬, 레나 혼, 애비 링컨 같은 음악가들이 "인종과 성별을 분리할 수 없는 해방을 추구했다"고 평가했다.

문화 외교의 선구자

마케바는 현재 소프트 파워문화 외교라고 불리는 개념의 선구자였다. 그녀는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보다는 아름다운 음악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2002년 폴라 음악상(음악계의 노벨상으로 불림)을 수상한 것은 그녀의 음악적 성취뿐만 아니라 문화를 통한 사회 기여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결론: 영원한 마마 아프리카

미리엄 마케바의 생애는 20세기 후반 아프리카와 세계사의 축소판이었다. 식민지와 아파르트헤이트의 억압 속에서 태어나 개인적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재능을 통해 세계 무대에 우뚝 섰다. 그리고 그 지위를 이용해 조국과 동족의 해방을 위해 싸웠다.

 

그녀는 강했다. 조국에서 추방당하고, 미국에서도 활동이 금지되고, 경제적 어려움과 개인적 상실을 겪으면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아프리카의 실상을 알리고, 아프리카 문화의 아름다움을 전파했다.

 

미리엠 마케바는 단순한 가수가 아니라 문화의 대변자이자 세상의 증언자였다. 그녀의 노래에 담긴 아프리카의 전통과 서정은 언어와 피부색을 초월하여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었다. 그녀는 진정한 '마마 아프리카'였고, 그 유산은 오늘날에도 계속 살아 숨 쉬고 있다.

 

2025년인 현재까지도 그녀의 "Pata Pata"는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으며, 그녀가 보여준 예술을 통한 사회 참여의 모델은 수많은 후배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미리엄 마케바는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위대한 예술가이자 인권 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