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발락의 탄생과 초기 경력
미하엘 발락은 1976년 9월 26일 동독의 드레스덴구 괴를리츠에서 태어났습니다. 2부 리그 출신의 축구 선수였던 아버지 스테판 발락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시작한 그는, 동독 유스 시스템의 산물답게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1995년 켐니츠 FC에서 프로 무대에 데뷔한 발락은 2년 후인 1997년 FC 카이저슬라우테른으로 이적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2군에서 시작했지만, 1998년 3월 레버쿠젠과의 리그 경기를 통해 분데스리가 무대에 본격적으로 데뷔했습니다. 놀랍게도 카이저슬라우테른은 승격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97-98시즌 바이에른 뮌헨을 밀어내고 우승을 차지하는 기적을 일으켰고, 발락은 데뷔 시즌에 우승을 경험하는 행운을 얻게 됩니다.
1998-99시즌부터 주전 멤버로 활약하기 시작한 발락은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챔피언스리그 8강 진출을 이끌며 실력을 입증했고, 1999년에는 독일 국가대표팀에도 차출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레버쿠젠 시절과 '콩락 전설'의 시작
1999년 바이엘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발락은 본격적으로 공격적인 역할을 맡으며 자신의 재능을 유럽 무대에 각인시켰습니다. 특히 2001-02시즌은 발락에게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시즌이자, 동시에 가장 아쉬운 시즌으로 기록됩니다.
이 시즌 발락은 모든 대회에서 23골을 기록하며 맹활약했습니다. 리그에서만 17골을 터뜨리며 득점왕 경쟁에서 1골 차이로 2위에 올랐고, 팀은 분데스리가 준우승, DFB-포칼 준우승,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이라는 '준우승 트레블'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챔피언스리그에서 발락의 활약은 특히 눈부셨습니다. 8강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2차전에서 2골을 터뜨리며 4-2 승리를 이끌었고, 4강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올드 트래포드 원정 경기에서 득점하며 2-2 무승부를 이끌었습니다. 레버쿠젠은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결승에 진출했지만, 햄든 파크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지네딘 지단의 왼발 발리슛에 무릎을 꿇으며 레알 마드리드에 패배했습니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발락은 2001-02시즌 UEFA 클럽 올해의 미드필더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열린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독일을 준우승으로 이끌었지만, 한국과의 준결승에서 경고를 받아 경고 누적으로 결승전 출전이 좌절되면서 브라질과의 결승전을 벤치에서 지켜봐야 했습니다. 이때부터 '콩락'이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바이에른 뮌헨에서의 전성기
레알 마드리드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발락은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감안하여 2002년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을 결정했습니다. 이적료는 600만 유로였습니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발락은 4시즌 동안 분데스리가 3회 우승과 DFB-포칼 3회 우승을 차지하며 더블을 3번이나 달성하는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분데스리가 107경기에서 44골을 기록하며 공격형 미드필더로서의 득점력을 과시했습니다.
2002-03시즌 첫 시즌에 바이에른은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더블을 달성했고, 발락은 결승전에서 2골을 넣으며 전 소속팀 카이저슬라우테른을 격파했습니다. 2004-05시즌에는 펠릭스 마가트 감독이 그를 유일한 자동 주전으로 선언할 정도로 신뢰를 받았습니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발락은 2002년, 2003년, 2005년 세 차례에 걸쳐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또한 2004년 FIFA 100주년을 맞아 펠레가 선정한 FIFA 100에 포함되는 등 세계적인 선수로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아쉬운 성적이 계속되었습니다. 중요한 경기에서의 부진으로 인해 울리 회네스 단장과 프란츠 베켄바워 회장으로부터 공개적인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첼시에서의 도전과 새로운 영광
2006년, 발락은 새로운 도전을 위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첼시로 이적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관심도 있었지만, 발락은 "EPL에서 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조세 무리뉴 감독을 보고 첼시를 선택했으며, 무리뉴와의 대화 후 "무리뉴를 위해 뛰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회고했습니다.
첼시와는 4년 계약을 체결했고, 카이저슬라우테른을 제외한 모든 소속팀에서 착용했던 등번호 13번을 달았습니다. 발락은 "파트릭 비에이라나 로이 킨처럼 프리미어리그의 전설이 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첼시 이적 초반에는 마케렐레, 에시앙, 램파드 등 세계 최고 수준의 미드필더들에 밀려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2007년부터 램파드의 부상을 계기로 중추적인 역할을 맡기 시작했고, 존 테리 결장 시에는 주장 완장까지 차고 경기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첼시에서 발락은 4시즌 동안 167경기에 출전해 26골을 기록했습니다. 2009-10시즌에는 프리미어리그와 FA컵 우승을 동시에 달성하며 한 해에 두 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렸습니다. 하지만 2007-08시즌에는 리그 준우승, 리그컵 준우승,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이라는 두 번째 '준우승 트레블'을 경험하며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특히 2008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승부차기 끝에 패배한 것은 발락에게 큰 상처로 남았습니다. 같은 해 유로 2008에서도 결승에서 스페인에 0-1로 패하며 네 번째 주요 대회 준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독일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
발락은 1999년 독일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여 98경기에 출전해 42골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웬만한 월드클래스 공격수에 준하는 기록으로, 미드필더로서는 놀라운 득점력을 보여줍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발락은 3골 4도움을 기록하며 독일의 준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기대치가 낮았던 독일을 결승까지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지만, 준결승 한국전에서 경고 누적으로 결승전 출전이 좌절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발락은 이 경기를 "감정적인 경기였다. 우리가 이겨도 결승에 나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기분이 묘했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러나 "집중력을 잃지 않았고 결승 진출을 이끄는 골을 넣었다"며 프로정신을 잃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주장으로서 팀을 3위로 이끌었고, 유로 2008에서도 결승에 진출하는 등 10년 넘게 독일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 월드컵을 앞두고 FA컵 결승전에서 케빈 프린스 보아텡의 태클에 의해 부상을 당하며 출전이 좌절되었습니다.
2011년 요아힘 뢰브 감독과의 불화로 센추리클럽(A매치 100경기) 가입 2경기를 남기고 국가대표에서 은퇴했습니다.
발락의 플레이 스타일과 특징
발락은 189cm의 압도적인 피지컬과 양발 사용 능력으로 미드필더 내에서 활동이 불가능한 포지션이 없을 정도로 만능 플레이어였습니다. 그에게는 미드필더들이 갖춰야 할 패싱력과 강력한 슈팅력, 단단한 피지컬과 많은 활동량, 팀의 중심이 되는 컨트롤 타워 능력이 있었습니다.
특히 발락의 중거리 슛은 매우 묵직하고 강력했으며, 넓은 패스 범위와 정확한 킥을 자랑했습니다. 큰 키로 인한 높은 제공권 장악력도 그의 장점이었고, 뛰어난 대인 수비와 태클 실력까지 겸비했습니다.
드리블을 화려하게 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적당한 발재간을 가지고 있어 두 명 정도의 압박을 탈압박으로 빠져나오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시야가 넓고 판단이 빨라 볼을 끌다가 뺏기는 일은 거의 없었고, 정확한 위치 선정으로 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조율했습니다.
전성기 시절에는 약점이 없는 선수라고 평가되었으며,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발락 혼자만 중원에 세워놔도 상대편 중원을 지배할 정도였습니다. 프란츠 베켄바워의 별명에서 유래한 '리틀 카이저(작은 황제)'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독일 축구의 상징적인 존재였습니다.
주요 수상 경력과 기록
발락의 화려한 수상 경력은 그의 위대함을 증명합니다. 클럽 차원에서는 분데스리가 4회 우승(카이저슬라우테른 1회, 바이에른 뮌헨 3회), 프리미어리그 1회 우승, DFB-포칼 3회 우승, FA컵 3회 우승 등을 기록했습니다.
개인 수상으로는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3회(2002, 2003, 2005), UEFA 클럽 올해의 미드필더 1회(2002), FIFA 100 선정(2004), UEFA 올해의 팀 1회,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회,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회 등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합니다.
국가대표팀에서는 월드컵 준우승 1회(2002), 월드컵 3위 1회(2006), 유로 준우승 1회(2008)를 기록했습니다. 비록 우승은 아니었지만, 2000년대 초반 '녹슨 전차'라고 불리던 독일 축구를 부흥시킨 중심에 있었던 선수였습니다.
은퇴와 은퇴 후 활동
2010년 첼시와의 계약 종료 후 발락은 레버쿠젠으로 돌아가 2시즌을 더 뛰었습니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한 기량 저하를 겪으며 2012년 호주 A리그의 웨스턴 시드니 원더러스 입단이 불발되자, 36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결정했습니다.
발락은 은퇴 성명을 통해 "36살이 되면서 프로선수 생활을 뒤돌아보게 됐다"며 "일류 감독, 그리고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해온 것은 특권과도 같았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관중이 꽉 들어찬 경기장에서 골을 넣은 기억들이 그리워질 것이다. 이제 그만둬야 할 때가 됐음을 느꼈다"고 덧붙였습니다.
은퇴 후 발락은 스카이 도이칠란트의 평론가로 활동하며 축구계에 남았습니다. 또한 불우한 어린이와 청소년을 지원하는 Michael Ballack Foundation을 설립하여 사회공헌 활동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2020년에는 장남 에밀리오가 포르투갈에서 쿼드바이크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발락은 당시 "세상이 무너졌다"고 말하며 큰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동료 선수들의 평가
발락의 위대함은 동료 선수들의 평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스티븐 제라드는 "발락은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뛰어난 시야, 기술 능력, 환상적인 슛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지네딘 지단은 "발락은 모든 것을 갖춘 선수입니다. 그는 강하고 빠르며 지능적입니다. 그는 골을 넣을 수 있고 수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완전한 미드필더입니다"라고 극찬했습니다.
프랭크 램파드는 "Michael Ballack은 놀라운 선수였습니다. 그는 기술적인 능력으로 게임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경기장 안팎에서 훌륭한 리더였습니다"라고 회상했습니다.
파올로 말디니는 "발락은 내가 맞닥뜨린 상대 중 가장 힘든 상대 중 하나였다. 그는 훌륭한 작업률을 보였고 항상 골문 앞에서 위협적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티에리 앙리는 "발락은 진정한 프로이자 훌륭한 선수였습니다. 그는 경기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경기장에서 리더였습니다. 그는 그의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하엘 발락의 유산
미하엘 발락은 2000년대를 대표하는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비록 '콩락'이라는 별명으로 준우승을 많이 경험했지만, 그의 실력과 리더십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요아힘 뢰브 감독은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훌륭한 축구선수다. 대표팀에서 그는 훌륭한 자질을 가진 매우 가치 있는 좋은 선수였다. 항상 현장을 지배하며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볼프강 니어스바츠 독일축구연맹 회장은 "발락은 독일 축구에 큰 공헌을 한 특별한 선수였다. 몇 년 동안 대표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은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아 있다"며 그의 공헌을 인정했습니다.
발락은 독일 축구의 암흑기를 지탱했던 선수로, 리틀 카이저라는 별명처럼 베켄바워의 뒤를 이을 독일 축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의 강력한 중거리 슛, 정확한 패스, 강인한 피지컬, 뛰어난 리더십은 지금도 많은 축구 팬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비록 주요 대회에서 우승을 많이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발락은 분명 그 시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의 열정과 헌신, 그리고 축구에 대한 사랑은 후배 선수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으며, 독일 축구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레전드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