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민천식의 생애와 역사적 맥락
민천식(閔天植, 1898~1967)은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며 복합적인 행보를 보인 인물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영휘(閔泳徽)의 서자이자 은행가로서의 활동, 전통 예술 보존자로서의 면모, 그리고 남이섬 논란의 중심에 선 민병도(閔丙燾)의 양부라는 점에서 역사적·문화적 중요성을 지닌다. 그의 생애는 식민지 시대 엘리트 계층의 도덕적 딜레마와 현대 사회의 역사 인식 문제를 응축적으로 보여준다.
가계 배경과 친일 가문의 영향
민영휘 가문의 권력 구조
민천식은 1898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민영휘와 첩실 안유풍(安遺豊) 사이에서 태어났다. 민영휘는 1910년 한일합방 성명서 서명,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 수여 등 친일 행적으로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된 인물이다. 그의 재산은 1930년대 기준 4,000만 원(현재 약 8조 원)에 달했으며, 이는 당시 조선 최대 규모였다.
재산 상속과 분배 메커니즘
민영휘 사후 재산은 자녀들에게 불균등하게 분배되었다. 민천식은 4만 석의 토지와 현금 수만 원을 상속받았으나, 1915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며 양자 민병도에게 재산이 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1927년 민병도(당시 12세) 명의로 충북 음성군 유포리 토지 3필지가 등기되는 등 법적 절차의 문제제기가 제기되기도 했다.
금융계에서의 활동과 사회적 영향
한일은행 지배인으로서의 역할
민천식은 아버지 민영휘가 1912년 인수한 한일은행(韓一銀行)에서 지배인 대리로 근무했다. 해당 은행은 일제의 경제정책에 부합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1930년 호서은행과 합병해 동일은행(東一銀行)으로 재편되었다. 그의 금융 활동은 가문의 친일적 경제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재산 관리와 토지 소유 현황
민천식 명의의 토지는 1912년 등기된 충북 음성군 유포리 21필지(5만 520㎡)를 중심으로 분포했다. 이 토지들은 1934년 민병도에게 양도되었으며, 1947년 조선신탁주식회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민병도 개인 소유로 귀속되었다. 이러한 토지 이전 과정에서 '친일재산의 은닉'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문화 예술계에서의 기여
해서탈춤의 전승자
민천식은 7세부터 봉산탈춤을 배우기 시작해 이윤화·박천만에게 사자머리·마부·놀량창 등을 전수받았다. 195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내각수반상을 수상했으며, 1967년 '봉산탈춤' 놀량 창과 사자마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의 제자 정재천·최창주는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로 활동하며 한국 전통예술 계승에 기여했다.
인천 지역 문화 정착
한국전쟁 이후 인천에 정착한 민천식은 해서탈춤과 민요 등 지역 문화재 복원에 주력했다. 2024년 인천문화재단은 '미메시스 – 민천식의 춤, 그 시간의 초월' 프로젝트를 통해 그의 예술 세계를 재조명하며, 차지언(황해도무형유산 화관무 예능보유자) 등 후계자들의 활약을 지원하고 있다.
사후의 논란과 역사적 평가
묘소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
청주 상당산성 내 민천식 부부 묘는 친일 유산으로서의 상징성이 문제시되었다. 2022년 모친 안유풍의 묘가 파묘된 후, 2024년 4월 현재 민천식 묘만 남아 있으며 국가귀속 토지에서의 강제 이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역사적 부정의 청산과 문화재 보존 사이의 긴장을 보여준다.
남이섬 소유권 논쟁에서의 위치
민천식의 양자 민병도가 1965년 남이섬을 매입할 당시 사용한 자금의 출처가 친일재산인지 여부는 2019년 서울중앙지방법원 판결에서 핵심 쟁점이었다. 법원은 "민병도의 재산 중 83%가 근로소득"이며 "민영휘로부터의 직접적 상속 증거 불충분"이라 판시해 친일재산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일부 학계에서는 "은행 경력 자체가 친일 가문의 특권에서 비롯되었다"는 반론을 제기하며 논의의 지속성을 보이고 있다.
결론: 미완의 역사적 평가
민천식의 생애는 식민지 시대 권력 구조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한편으로는 전통 예술의 계승자로서 문화적 가치를 창출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친일 가문의 일원으로서 식민지 경제 체제에 기여했다. 그의 유산을 둘러싼 현대적 논쟁은 단순한 '친일 vs. 애국'의 이분법을 넘어, 역사적 사실의 다층적 해석과 법적·윤리적 판단의 복합성을 요구한다. 향후 연구에서는 금융 기록과 토지 등기 문서의 체계적 분석을 통해 보다 입체적인 평가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