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선 박사는 누구인가
박병선(朴炳善, 1923년 3월 25일~2011년 11월 22일) 박사는 대한민국 출신의 역사학자이자 서지학자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한국의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찾아내고 그 가치를 세계에 알린 인물입니다. 그녀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하여 그 가치를 입증하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의궤 297권을 찾아내어 대한민국으로 반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1923년 전주에서 태어난 박병선 박사는 진명여자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를 졸업한 후, 1955년 대한민국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프랑스 유학 비자를 받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프랑스에서 그녀는 소르본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프랑스고등교육원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1967년에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지만, 평생을 한국 문화유산 연구와 반환 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박병선 박사의 업적은 단순히 문화재를 발견한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녀는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임을 증명하기 위해 5년간의 치열한 연구를 수행하였고,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을 위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해고당한 후에도 10여 년간 매일 도서관을 찾아 연구를 계속하였습니다. 2011년 5월 외규장각 의궤가 145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후, 같은 해 11월 22일 프랑스 파리에서 88세의 나이로 타계하였습니다.
생애와 학문적 배경
출생과 성장 배경
박병선 박사는 1923년 3월 25일 전주에서 박정근의 삼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 경성부에서 성장한 그녀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는 '책벌레'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부유한 환경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그녀는 천주교 신자로서 수녀가 되기를 꿈꾸기도 하였으나, 결국 학문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녀의 가문은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에게 자금을 댄 집안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0년 한국전쟁의 와중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현 역사교육과)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였습니다. 대학 졸업 후 프랑스 유학을 결심한 그녀는 1955년 유학길에 오르기 전 스승인 이병도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이때 이병도 교수는 그녀에게 "프랑스에 가게 되면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의궤의 행방을 찾아보라"고 당부하였고, 이것이 그녀 평생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유학과 학위 취득
1955년 대한민국 여성 최초로 프랑스 유학 비자를 받아 프랑스로 건너간 박병선은 파리에서 본격적인 학문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6·25 전쟁 직후 민간인 여성으로서는 첫 번째로 발급된 여권을 소지하고 프랑스로 향한 그녀는, 프랑스인들의 한국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국 역사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역사학 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벨기에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한 후, 파리 소르본대학교(파리 제7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프랑스고등교육원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박사 과정을 밟는 동안에도 그녀는 스승의 당부를 잊지 않고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자주 찾으며 외규장각 의궤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습니다.
1964년부터 1974년까지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의 연구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67년부터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는 파리 제7대학교 동양학부에서 강사로도 활동하였습니다. 1967년 동백림 사건(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가 귀국을 종용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여 프랑스에서의 연구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의 발견과 금속활자 입증
세계 도서의 해와 직지의 발견
박병선 박사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1972년 『직지심체요절』(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세상에 알린 것입니다. 1969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부터 "3년 후 개최되는 '세계 도서의 해'에 출품할 만한 동양 고서적이 있는지 찾아보라"는 지시를 받은 그녀는 도서관 수장고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그녀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일주일에 15시간 일하는 임시직 특별보조원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빛이 바래 남루한 서적 한 권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직지심체요절』이었습니다. 책의 끝머리에는 "선광 7년(1377년)에 청주 외곽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어 널리 배포했다(宣光七年丁巳七月日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1377년이라면 그때까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았던 독일의 구텐베르크 『42행 성서』(1455년 완성)보다 무려 78년이 앞선 것이었습니다.
박병선 박사는 이미 프랑스 서지학자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의 『한국서지』를 통하여 『직지심체요절』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국립도서관 측은 단순히 책에 기록된 문장만으로는 신뢰할 수 없다며 그녀의 보고를 처음에는 무시하였습니다. 심지어 "말도 안 된다"며 무시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금속활자본 입증을 위한 치열한 연구
박병선 박사는 혼자서 스스로 직지심체요절이 최초의 금속활자본임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한국 인쇄사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 인쇄 기술에 대한 책을 찾았으나 그런 책을 찾지 못해 일본이나 중국의 인쇄술 관련 책들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직지』가 목판이 아닌 활자로 찍은 책임을 증명한 뒤, 이어 금속으로 주조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가지 물질을 가지고 글자를 만드는 실험을 직접 수행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감자로 도장처럼 글자를 만들고, 다음에는 나무로 새기고, 그 다음에는 진흙으로 만들어 오븐에 넣고 굽는 등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1968년 프랑스의 작은 아파트 부엌에서는 진흙 실험 도중 오븐이 펑 하고 터지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진흙 활자를 구워 도자기를 굽듯이 열을 더 많이 주어야 겠다고 생각하여 오븐 온도를 높여 오래 두었다가 오븐이 폭발한 것입니다. 이러한 치열한 실험과 연구 과정에서 세 번의 화재까지 겪었습니다.
연구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자신의 골동품까지 팔았던 그녀는, 실험 결과 이러한 활자들은 비슷하기는 하지만 사진으로 확대해 보니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후 인쇄소의 옛 활자를 구하여 관찰하고 물어보면서 점차 『직지』가 금속활자본임을 증명해 나갔습니다. 금속활자에는 글자 가장자리에 티눈 같은 것이 붙어 있는데, 이는 금속활자가 쇠를 부어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활자에 붙은 '쇠똥'을 미처 떼어 버리지 못하고 인쇄를 하면 글자 가장자리에 먹물이 번진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금속활자본에는 삐뚤어진 글자가 더러 있는데, 이는 인쇄할 때 밀려서 삐뚤어진 것이라는 점도 입증하였습니다.
이러한 5년여의 고통스러운 연구 끝에, 박병선 박사는 1972년 유네스코가 주최한 '세계 도서의 해' 기념 도서 전시회를 통해 『직지』를 세상에 공개하였습니다. 이는 세계 학계, 도서관계, 인쇄 출판계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었으며, 이후 수많은 논란과 외교적 문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전시회 이후 그녀는 한국의 문화재관리국에 흑백 영인본을 보냈으며, 1973년에 한국의 서지학자들은 이를 놓고 논쟁을 벌인 끝에 『직지』의 여러 특징을 고증하여 『직지』가 초기 금속활자본이라고 판정하였습니다.
직지의 세계적 인정과 유네스코 등재
박병선 박사의 노력으로 『직지심체요절』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금속활자 인쇄술의 종주국임을 세계에 입증할 수 있게 되었으며, 우리 민족의 문화적 자부심이 세계만방에 드날리게 되었습니다. 박병선 박사는 이러한 공로로 '직지 대모(代母)'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약 박병선 박사가 없었다면 프랑스는 『직지』가 금속활자 최고본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며, 한국의 인쇄 역사를 세계에 알리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녀의 발견과 입증은 한국인의 문화적 긍지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외규장각 의궤의 발견과 반환 운동
외규장각 의궤란 무엇인가
외규장각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주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행사를 열라고 지시한 왕의 전교부터 행사를 위해 관청 사이에 오간 문서와 왕과 신하들이 논의한 기록까지 모든 기록을 총망라한 백서 같은 책입니다. 의궤는 조선 왕실에서 주요 행사의 전 과정을 정리해 책으로 엮은 것으로, '조선 기록 문화의 꽃'이라 불립니다. 조선왕실 의궤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외규장각은 강화도에 있던 조선 왕실의 도서관으로,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공하여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 297권을 약탈해갔습니다. 병인양요는 고종 3년에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사건입니다. 프랑스군이 300권의 책을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지만 반환받은 297권 외의 3권 중 1권은 영국 국립도서관에, 2권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베르사유 창고에서의 발견
박병선 박사는 1967년부터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면서 스승 이병도의 당부에 따라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다녔습니다. 도서관 소장품 중 우리의 문화재를 찾기 위해 지하 수장고와 여러 창고에서 3천만 종이 넘는 장서를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파트 타임의 직원에서 특별연구원으로 임명된 박병선 박사는 외규장각 도서를 찾는데 모든 열정을 바쳤습니다.
1975년, 20년간 찾아 헤매던 끝에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의 파손된 고문서를 모아둔 창고에서 푸른 천으로 담겨진 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르사유 궁정에 위치한 별관 수장고에 방치되어 있던 『외규장각의궤』 191종 297권을 발굴한 것입니다. 외규장각 도서들은 발견 당시 중국책으로 분류되어 있었으며, 보관상태가 엉망이었습니다.
박병선 박사는 즉시 외규장각 도서의 발견 사실과 상태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고했습니다. 그녀는 고국으로도 메시지를 보내 "지금 우리의 외규장각 의궤가 프랑스 국립도서관 창고에서 폐기할 책으로 취급되어 폐기 처분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며 "바로 지금이 반환을 요청할 적절한 시기"라고 알렸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는 보관상태가 엉망이자 외규장각 도서의 실체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해고와 불굴의 연구 정신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자 프랑스 국립도서관측은 박병선 박사를 의심했고, 과거 프랑스가 행했던 약탈행위를 까발린 것에 불편해하여 1979년 사표를 강요했습니다. 죄명은 "비밀 누설"이었으며, 약탈이라는 그들의 '원죄'를 드러낸 데 대한 보복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권고사직이라는 형태로 도서관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박병선 박사는 시련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198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떠난 박병선은 도서관측의 따가운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서가 아닌 일반 방문객 신분으로 매일같이 도서관에 출근하여 외규장각 도서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그녀는 10여 년간 매일 도서관을 찾아 의궤 297권의 목차와 내용을 홀로 정리하였습니다. 프랑스 도서관에서 박병선 박사를 해고했지만 10년을 매일같이 출입하며 13년 동안 의궤의 내용을 홀로 연구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국 정부에서도 주불한국대사관에 사무실 하나를 연구실로 내주는 방식으로 지원하였습니다. 한편 도서관 일을 그만둔 뒤 박병선은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의 동양학 전공 프랑크 교수의 연구원이 되어 1975년부터 1997년까지 연구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의궤 해제 작업과 반환 운동
1980년부터 시작된 해제 작업은 10년이 걸려 1990년에 끝났습니다. 박병선은 『조선조의 의궤(파리소장본과 국내소장본의 서지학적 비교검토)』라는 책을 출판했으며, 이 책은 훗날 대한민국이 프랑스와 벌인 외규장각 도서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해제 작업을 마쳤지만 상업성이 없어 프랑스에서 출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는 서울대 규장각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이태진 교수에게 전달되었습니다.
1992년 서울대의 지원으로 불어판 해제서, 『Régles Protocolaires de la Cour Royale de la Corée des Li, 1392~1910』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박병선은 결혼도 포기하고 30여년의 세월 동안 홀로 외규장각 의궤목록과 요약본을 불어로 정리하고 '병인년, 조선을 침노하다'라는 한국어·프랑스어 서적을 발간해 세계에 배포하며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알렸습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외규장각 의궤 존재를 입증한 후로는 외규장각 의궤의 한국 반환 운동을 펼쳤으며,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이었던 이태진 서울대 교수와 함께 외규장각 의궤 반환에 핵심적인 공을 세웠습니다. 프랑스는 그녀에게 '한국의 스파이'라는 오명을 씌우기까지 하였으나, 그녀는 한국 정부와 민간단체들과 함께 의궤 반환운동을 적극적으로 일으켰습니다.
의궤의 귀환과 박병선의 마지막
긴 노력 끝에 2011년 4월 14일부터 5월 27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외규장각 의궤 297권 전체가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약탈당한 지 145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직장암 4기 판정을 받은 상태였던 박병선 박사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고, 2011년 6월에는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 환영 행사 참석차 서울을 방문하여 귀환을 확인하였습니다.
다만 외규장각 의궤는 완전한 소유권 반환이 아닌 5년마다 갱신하는 '영구 임대' 형식으로 돌아왔습니다. 박병선 박사는 대여 형식은 옳지 않다며 온전한 반환을 촉구했으나, 이 일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성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궤를 반환받고 잠시 뒤인 2011년 11월 22일,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 파리시내 15구 잔 가르니에 병원에서 향년 88세로 타계하였습니다.
당시 국내에 있던 의궤는 대부분 신하들이 열람하는 분상용 의궤였으나, 프랑스에서 보관 중이던 외규장각 의궤는 표지가 파란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어람용 의궤로서 297권 중 289책이 최고 수준의 의궤였습니다. 또한 297책 중 29책이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국내외 유일본이었습니다.
기타 문화유산 발굴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청사 발견
박병선 박사는 외규장각 의궤와 직지심체요절 발견 외에도 다른 중요한 문화유산 발굴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 중 하나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있던 청사를 찾아낸 것입니다.
1919년 2월 1일 상해를 출발한 김규식은 3월 13일 마르세유에 도착했고 파리에서 5개월간 머물렀습니다. 같은 해 4월 13일 상해 임시정부가 정식으로 발족된 후 김규식을 초대 외무부장관에 임명하였고, 김규식은 자기가 쓰던 사무실을 상해 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파리대표부)로 명명하였습니다. 이 위원부의 주된 임무는 파리 강화회의 의장과 이사회 임원들에게 대한민국의 영토회복과 독립을 위한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여 일제의 탄압과 폭력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박병선 박사는 프랑스 외무부 고문서관 등에서 독립운동 사료를 찾아 정리하던 중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청사가 자리했던 건물을 발견하였습니다. 파리 9구 샤토덩 거리 38번지에 위치한 이 건물은 김규식 박사 일행이 조국의 독립 승인을 위한 외교활동에 심혈을 기울인 장소였습니다.
박병선 박사는 한불수교 120주년을 기하여 2006년 이곳에 한국독립운동기념관 건립을 염원하여 정부 및 관련기관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집주인의 반대에도 대사관과 협력하여 2007년 3월 1일 현판을 걸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역사적 의미가 다시 조명받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소재 독립운동 자료 발굴
박병선 박사는 계속해서 문화유산 발굴과 반환운동 이외에 의궤, 인쇄, 병인양요, 독립운동 등과 관련된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였습니다. 프랑스에서 본 한국 3·1운동 자료와 독립운동사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그녀는 파리 근교에서 살면서 한국 관련 각종 고서 연구와 프랑스에서 본 한국의 3·1운동 등에 관한 독립운동사를 정리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박병선 박사는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도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 - 2편'의 저술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유언으로 이 저술을 마무리 지어달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저술 활동과 학술적 기여
주요 저서
박병선 박사는 평생에 걸쳐 한국 문화와 역사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저술 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였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인쇄사』가 있으며, 이 책은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 한국어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고대의 인쇄부터 현대의 인쇄까지 우리의 인쇄역사를 자세히 담고 있으며, 붓, 먹, 종이, 제본 분야까지 포괄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무속사』, 『한국의 역사』 등을 프랑스어로 펴냈으며, 이러한 저서들을 통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 한국 문화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1992년에는 외규장각 의궤 해제서인 『Régles Protocolaires de la Cour Royale de la Corée des Li, 1392~1910』을 출판하여 의궤의 학술적 가치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병인년, 조선을 침노하다'라는 한국어·프랑스어 서적을 발간하여 병인양요의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고 세계에 배포하였습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은 인쇄역사를 체계화하는 차원에서 박병선 박사 저술의 『한국의 인쇄』를 발행하였습니다.
학술적 의의와 기여
박병선 박사의 학술적 기여는 단순히 문화재를 발견하고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풍부한 사료적 가치를 가진 외규장각 도서를 조명하여 한국인의 문화적 긍지를 높여 주었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이 금속활자본임을 증명하기 위해 체계적인 연구 방법론을 적용하였으며, 5년간의 실험과 고증을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하였습니다.
외규장각 의궤에 대해서도 10년간의 해제 작업을 통해 각 의궤의 내용과 가치를 상세히 정리하였으며, 이는 후속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직지' 발견 후 세계 유수의 연구기관과 여러 대학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프랑스 소재 한국 관련자료 발굴이라는 필생의 과업을 위해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박병선 박사는 역사와 문화적 진실을 밝혀낸 선구적 사학자라는 평가를 받아 왔습니다. 그녀의 연구는 한국 인쇄사, 서지학, 왕실문화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 학술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며, 한국 문화유산의 세계적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훈장과 포상
국내 훈장
박병선 박사는 그녀의 평생에 걸친 문화유산 발굴과 반환 노력에 대해 여러 차례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았습니다. 1998년에는 청주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으며, 1999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상하였습니다. 2001년에는 한국 방송국 KBS가 주관하는 '해외동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2004년에는 대한인쇄정보기술협회로부터 공로패를 받았습니다.
2007년에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을 처음 발굴하고 외규장각 도서를 발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3등급)을 받았습니다. 2011년 9월에는 외규장각 도서의 국내 반환에 기여한 공로로 가장 높은 등급인 국민훈장 모란장이 수여되었습니다. 다만 당시 병세가 호전되지 못해 직접 전달받지는 못하였고, 김성환 외교통상부장관이 병원을 방문하여 전수할 예정이었으나 박병선 박사의 요청에 따라 추후 별도로 전수하기로 하였습니다.
사후 명예
박병선 박사는 천주교 신자로서 결혼을 하지 않아 직계가족이 없었으며, 평소 자신이 숨지면 화장해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변에 유해를 뿌려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박 박사가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이후 프랑스로 귀화했지만 외규장각 도서 반환 등 국가적 공로가 큰 점을 인정하여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방안을 검토하였습니다.
2012년 3월 28일 고 박병선 박사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고인은 먼지더미 속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내고,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임을 증명하였으며, 역사와 문화적 진실을 밝혀낸 선구적 사학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은 박병선 박사의 선종 1주기를 맞아 2012년 11월 23일 추모미사와 추모행사 및 기념 자료실 개관식을 가졌습니다. 박병선 박사는 선종 열흘 전에 인천가톨릭대학교에 신학생 양성을 위한 장학금과 소장도서 기증의사를 밝혔으며, 자료실에는 박병선 박사가 생전에 소장했던 학술자료(도서 1,096종 1,286권, 비도서 49종 68점)와 유품 일부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자료실 명칭은 고인의 세례명인 루갈다(Lutgarda)를 따서 루갈다 자료실(Lutgarda Archives)로 명명되었습니다.
역사적 의의와 평가
문화유산 수호자로서의 의미
박병선 박사는 단순한 역사학자나 서지학자를 넘어, 한국 문화유산의 수호자이자 되찾아온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외규장각 의궤는 프랑스 도서관 창고에서 폐기 처분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평생 미혼으로 지내며 직지와 외규장각 의궤 도서 연구와 반환에 매달렸던 박병선 박사에게는 역사학자이자 서지학자로서 사명감과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1972년 세계 도서의 해 전시회가 끝난 뒤 직지 흑백사진을 갖고 방한해 전문가들에게 두 차례나 직지가 정말 금속활자본이 맞는지 감정하는 작업을 벌일 정도로 열정적이었습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해고당한 후에도 10여 년간 매일 도서관을 찾아 연구를 계속한 그녀의 불굴의 의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그녀를 '파란 책 속에 묻혀 있는 여성'이라고 불렀으며, 한국에서는 '직지 대모'로 불리며 존경받았습니다.
한국 문화의 세계적 위상 제고
박병선 박사의 업적은 한국 문화의 세계적 위상을 크게 높이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고, 외규장각 의궤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한국의 기록 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발견과 연구는 한국이 금속활자 인쇄술의 종주국임을 입증하였으며, 조선시대 왕실 기록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발견한 것을 넘어, 한국 문화의 창의성과 독창성을 증명한 것이었습니다.
박병선 박사는 『한국의 인쇄사』, 『한국의 무속사』, 『한국의 역사』 등을 프랑스어로 저술하여 유럽 사회에 한국 문화를 체계적으로 소개하였습니다. 이러한 저술 활동은 한국학의 국제적 확산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개인적 희생과 헌신
박병선 박사의 삶은 개인적 희생과 헌신의 연속이었습니다. 수녀를 꿈꿨던 그녀는 결혼을 포기하고 평생을 한국 문화유산 연구에 바쳤습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로 귀화하였지만, 모국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습니다.
연구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자신의 골동품을 팔았으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해고당한 후에도 일반인 자격으로 매일 도서관을 찾아 연구를 계속하였습니다. 암 투병 중에도 외규장각 의궤 귀환을 확인하고자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죽기 직전까지 병인양요 관련 저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박병선 박사는 "비록 1967년 발생한 동백림 사건 이후 프랑스로 귀화했지만 모국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아 우리를 더욱 숙연하게 한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삶은 진정한 애국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문화적 투사이자 수도승과 같은 노력으로 일관되었습니다.
박병선 박사의 유산과 현재적 의미
외규장각 의궤의 현재
2011년 프랑스에서 대여 형식으로 국내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297권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되고 있습니다. 2022년 11월 1일부터 2023년 3월 19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외규장각 의궤, 그 고귀함의 의미'전이 열렸으며, 귀환한 의궤 일부를 대중에 공개한 적은 있으나 297권 전권을 공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특별전 기간 동안 박병선 박사의 11주기를 맞아 그를 기억·추모하기 위해 2022년 11월 21~27일 무료관람을 실시하였습니다. 또한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담아 '외규장각 의궤 데이터베이스'(https://www.museum.go.kr/uigwe/)를 구축하였으며, 학술대회와 대중강연도 개최하였습니다.
윤성용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를 10여년간 많이 연구했고 성과를 되돌아보는 의미에서 297권을 모두 공개하게 됐다"며 "297권 대부분은 임금만 볼 수 있던 어람용 의궤로, 조선의 문화 역량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조선 기록문화의 정수인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다양한 관련 자료 등으로 전시를 구성했다"며 "이번 특별전을 통해 조선왕조 의궤, 특히 외규장각 의궤의 드높은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의 현재
직지심체요절은 여전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완전한 반환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993년 한국에 온 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은 외규장각 의궤를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때 직지를 비롯해 다른 고서적 반환 문제도 함께 논의되었습니다. 하지만 외규장각 의궤는 완전한 소유권 반환이 아닌 5년마다 갱신하는 '영구 임대' 형식으로 돌아왔고, 직지는 돌려받는 것에 실패하였습니다.
2023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특별전에서 직지가 다시 주목받았으며, 전시를 찾은 박병선의 친구 은정과 손녀 하림은 그 감동을 이어받아 "직지를 다시 고국으로"라는 새로운 다짐을 품었습니다. 직지심체요절의 완전한 귀환은 여전히 한국 문화계의 숙원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2023년에는 박병선 박사가 직지의 첫 발견자가 맞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하였습니다. 50년 만에 공개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일부에서는 박병선 박사 이전에 다른 사람이 직지를 알고 있었다는 주장을 제기하였으나, 박병선 박사가 직지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고 금속활자본임을 입증한 공로는 여전히 인정받고 있습니다.
후대에 미친 영향
박병선 박사의 삶과 업적은 많은 후학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녀의 불굴의 의지와 헌신은 문화유산 보호 운동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으며, 역사 연구자들에게는 학문적 정직성과 끈기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교육 현장에서도 박병선 박사의 이야기는 자주 활용되고 있습니다. 중학교 영어 교과서 지문에 그녀의 이야기가 소개되었으며, 많은 어린이 도서와 청소년 도서에서 그녀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2025년에는 알리 오페라단이 '직지를 찾아서'라는 가족 오페라를 무대에 올려 박병선 박사의 스토리를 예술 작품으로 재창조하기도 하였습니다.
2012년 출판된 『직지와 외규장각 의궤의 어머니 박병선』은 박병선 박사의 구술 인터뷰를 통해 담아낸 일대기로, 박병선 박사가 직접 추천한 책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박병선 박사의 정신은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박병선 박사 주요 경력 및 업적
| 시기 | 주요 내용 |
|---|---|
| 1923년 3월 25일 | 전주 출생 (출생지는 서울이라는 기록도 있음) |
| 1950년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졸업 |
| 1955년 | 대한민국 여성 최초 프랑스 유학 (유학비자 발급) |
| 1964-1974년 |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 |
| 1967년 | 동백림 사건 연루로 프랑스 국적 취득 |
| 1967-1979년 |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근무 |
| 1971-1976년 | 파리 제7대학교 동양학부 강사 |
| 1972년 | 직지심체요절 발견 및 세계 도서의 해 전시회 출품 |
| 1975년 | 외규장각 의궤 191종 297권 발견 |
| 1975-1997년 | 콜레주 드 프랑스 연구원 |
| 1979년 |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직 |
| 1980-1990년 | 외규장각 의궤 해제 작업 수행 |
| 1992년 | 외규장각 의궤 해제서 출판 |
| 1999년 |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상 |
| 2001년 | 직지심체요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
| 2007년 |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
| 2011년 5월 | 외규장각 의궤 297권 대여 형식으로 한국 귀환 |
| 2011년 9월 |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 (외규장각 도서 반환 기여) |
| 2011년 11월 22일 | 프랑스 파리에서 타계 (향년 88세) |
결론
박병선(朴炳善, 1923-2011) 박사는 한국 문화유산의 발굴과 반환에 평생을 헌신한 위대한 역사학자이자 서지학자입니다. 그녀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하여 한국이 금속활자 인쇄술의 종주국임을 세계에 입증하였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의궤 297권을 찾아내어 145년 만에 한국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1955년 대한민국 여성 최초로 프랑스 유학 비자를 받아 프랑스로 건너간 그녀는, 스승 이병도 교수의 당부를 평생의 소명으로 삼아 프랑스에 있는 한국 문화재를 찾는 일에 모든 열정을 쏟았습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며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한 후 5년간의 치열한 연구 끝에 그것이 금속활자본임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였고, 1972년 세계 도서의 해 전시회를 통해 세계에 공개하였습니다.
1975년에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 창고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하였으나, 이 사실을 공개한 대가로 도서관에서 해고당하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굴하지 않고 10여 년간 일반인 자격으로 매일 도서관을 찾아 의궤의 내용을 정리하고 해제 작업을 수행하였으며, 외규장각 의궤 반환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쳤습니다.
박병선 박사는 결혼을 포기하고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한국 문화유산 연구에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연구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골동품을 팔았으며, 암 투병 중에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2011년 외규장각 의궤가 145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후, 같은 해 11월 22일 프랑스 파리에서 88세의 나이로 타계하였습니다.
그녀의 업적은 단순히 문화재를 발견한 것을 넘어,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인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 의궤는 모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이는 박병선 박사의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박병선 박사는 199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 2011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으며, 사후에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그녀의 공로가 영원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녀의 삶은 진정한 애국자이자 문화 전사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후대에게 학문적 정직성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조국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외규장각 의궤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연구되고 전시되고 있으며, 직지심체요절의 완전한 귀환을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박병선 박사가 평생을 바쳐 지킨 한국 문화유산은 이제 우리 모두의 자산이 되어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녀의 정신은 문화유산 보호와 연구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귀감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