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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인 사단장 : 북한 도발에 단호히 맞선 전설의 지휘관

by jisiktalk 2025. 2. 25.

박정인 사단장은 1973년 3월 7일, 북한의 기습 사격에 강력히 대응하여 '3·7 완전작전'을 지휘한 대한민국의 예비역 육군 준장입니다. 그의 단호한 대응은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후 군사 전략과 대응 방안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생애와 군 경력

1928년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태어난 박정인 장군은 월남하여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임관하였습니다. 6·25 전쟁 당시에는 미군 전차 소대와 함께 영천을 탈환하는 등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6사단 19연대 작전주임으로서 북진 중 평안북도 희천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두 차례의 탈출 시도 끝에 5개월 만에 귀환하는 등 전설적인 이력을 남겼습니다.

6·25 전쟁에서의 활약

  • 영천 전투 참여: 미군 전차 소대와 협력하여 영천을 탈환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 포로 생활과 탈출: 평안북도 희천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두 차례의 탈출 시도 끝에 5개월 만에 귀환하였습니다.
  • 작전주임으로서의 역할: 6사단 19연대 작전주임으로서 북진 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3·7 완전작전: 북한 도발에 대한 강력한 응징

1973년 3월 7일,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DMZ)에서 군사분계선 표지판 정비 작업을 마치고 귀대하던 백골부대 소속 병사들이 북한군의 기습 사격을 받아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3사단장이었던 박정인 장군은 즉각적으로 105mm 및 155mm 곡사포를 동원하여 북한군 559 GP를 향해 포격을 지시하였고, 이로 인해 북한군 약 80여 명이 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건의 배경과 경과

  • 북한군의 기습 사격: DMZ에서 표지판 정비 작업을 마치고 귀대하던 우리 군인들이 북한군의 기습 사격을 받았습니다.
  • 부상자 발생: 이 사격으로 인해 황모 대위와 김모 하사 등 2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 사격 중지 요청: 박정인 장군은 북한군에게 사격 중지를 요청하였으나, 북한군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사격을 가하였습니다.

강력한 대응과 결과

  • 포격 명령: 박정인 장군은 155mm 및 105mm 곡사포를 동원하여 북한군 559 GP를 향해 포격을 지시하였습니다.
  • 북한군 피해: 이 포격으로 인해 북한군 약 80여 명이 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에 귀순한 북한군의 증언에 따르면 약 30명이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 추가적인 무력 시위: 그날 밤, 박정인 장군은 사단 내 모든 트럭을 동원하여 라이트를 켠 채 DMZ 남한 한계선까지 진출시키는 무력 시위를 벌였습니다.

전역과 이후의 삶

이러한 강력한 대응 이후, 상부의 허락 없이 임의로 대응 사격을 했다는 이유로 박정인 장군은 보직 해임되었으며, 5개월 뒤 전역하였습니다. 전역 후에는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을 맡아 우리 군의 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데 힘썼으며, 회고록 '풍운의 별'을 통해 본인이 겪은 생생한 군 경험을 공유하였습니다.

군사 역사 기록에의 기여

  • 전사편찬위원장으로서의 역할: 전역 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을 맡아 우리 군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기록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 회고록 '풍운의 별' 출간: 자신의 군 경력과 경험을 담은 회고록을 통해 후배 군인들과 일반 대중에게 귀중한 역사적 자료를 제공하였습니다.
  • 군사 기획 연재 참여: 2009년부터 2010년까지 국방일보 군사기획 연재물인 '남기고 싶은 그때 그 이야기'를 통해 생생한 군 경험을 공유하였습니다.

가족과 유산

박정인 장군의 외아들인 홍건 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으며, 손자 선욱 씨도 육사 출신 현역 대위로 복무하는 등 호국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는 북한의 도발에 단호히 대응한 지휘관으로서, 후배들에게 "북한은 강에는 약으로, 약에는 강으로 대응하는 집단"이라며 도발에는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는 2016년 2월 3일, 향년 88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호국 가문의 전통

  • 아들 홍건 씨: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습니다.
  • 손자 선욱 씨: 육사 출신 현역 대위로 복무 중입니다.

박정인 장군은 자신의 군 경험을 통해 대한민국 군의 강력한 대응 정신을 강조했으며, 북한의 도발에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믿음을 후배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단순히 전장의 승리에 그치지 않고, 국가 안보를 지키는 강력한 군 정신과 인내, 용기를 의미합니다.

박정인 장군의 전설적인 리더십

박정인 장군의 리더십은 단호한 결단력과 책임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가 이끈 '3·7 완전작전'은 단순한 군사적 대응을 넘어, 한 국가의 주권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군사적 결단은 당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박정인 장군은 그 어떤 도발에도 주저하지 않고 강력하게 맞섰으며, 이는 대한민국의 군사 전략과 전방위적 대응 방안을 재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지도자로서 후세들에게 군사적 강직함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후배들에게 남긴 교훈

박정인 장군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배들에게 "군인은 항상 준비하고, 국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그가 강조한 것은, 단순히 무력 사용을 넘어 외교적 협상과 군사적 대응의 균형을 맞추는 것의 중요성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북한과의 평화적인 해결을 원했지만, 도발에는 반드시 대응해야 한다는 철학을 유지했습니다.

박정인 장군의 군사적 업적과 그의 지도력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군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으로 남아 있으며, 그의 지휘 아래에서의 강력한 대응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결론

박정인 장군은 대한민국 군사 역사에서 단호한 대응과 강력한 리더십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1973년 3·7 완전작전에서 보여준 그의 결단력은 북한의 도발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하는 자세를 확립했으며, 이는 이후 군사 전략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박정인 장군의 군 경력은 단지 전장에서의 승리에 그치지 않고, 후배 군인들에게 국가 안보를 지키는 의무와 책임을 일깨우는 중요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산은 단호함과 용기의 정신을 통해 계속해서 후세에 전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