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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랑제브 : 1618–1707, 무굴 제국의 광휘와 그림자

by jisiktalk 2025. 5. 28.

아우랑제브(1618–1707)는 무굴 제국의 최전성기와 쇠락의 분기점에 선 복합적 인물입니다. 49년간의 치세 동안 인도 아대륙의 90%를 정복하며 제국을 사상 최대 판도로 확장했으나, 종교적 불관용과 끝없는 전쟁으로 인해 제국의 해체를 초래한 역설적 지도자입니다. 그의 통치는 군사적 업적과 문화적 억압, 경제적 번영과 재정 파탄이 공존하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1. 권력 장악 과정과 초기 통치

1.1 왕위 계승 전쟁

1657년 샤 자한의 병환 소식이 전해지자 네 황자 간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발발했습니다. 아우랑제브는 1658년 사무가르 전투에서 형 다라 시코를 격파한 후, 아그라 요새에서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제위를 찬탈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생 무라드 바흐슈를 처형하고 조카들을 살해하며 피의 숙청을 단행했는데, 이는 티무르 왕조의 전통인 '왕위 계승의 법칙'(Yasa)을 잔혹하게 실행한 사례였습니다.

1.2 행정 개혁과 초기 성과

집권 초기 아우랑제브는 빈민 구제를 위해 델리와 아그라에 20개 이상의 무료 급식소를 설치했으며, 곡물 유통세를 폐지하는 등 민생 안정책을 펼쳤습니다. 1667년 도입한 '자비르'(토지 측량) 제도는 기존의 관습적 세금 체계를 과학적 측량으로 대체하며 세수 증대를 이뤘으나, 후기 전쟁으로 인해 과도한 착취로 변질되었습니다.

2. 군사적 팽창과 영토 관리

2.1 북부 정복 사업

1660년대 펀자브 지방의 시크교도 반란을 진압하며 카불에서 콜카타에 이르는 인도 북부 완전 장악을 달성했습니다. 1669년 자트족 봉기 시 5만 명 학살로, 이 지역의 반무굴 감정을 영구화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2.2 데칸 원정과 최대 판도

1686–1687년 비자푸르·골콘다 술탄국 정복으로, 남인도까지 포괄하는 400만 km²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27년간 계속된 데칸 전쟁은 연간 1억 루피의 전비를 소모했으며, 제국 재정의 81%를 군사 지출에 할애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3. 종교 정책과 사회적 영향

3.1 이슬람 근본주의 시행

1679년 악바르 대제가 폐지한 지즈야(비무슬림 인두세)를 부활시켜, 힌두교도에게 연간 4,800만 루피 추가 부담을 강요했습니다. 1669년 공포한 '사원 파괠령'에 따라 바라나시 비슈와나트 사원 등 3,000여 개 힌두 사원이 철거되었고, 이 재료로 아그라 모스크를 건축하는 등 종교적 갈등을 가속화했습니다.

3.2 문화적 억압 조치

1670년 궁정 음악을 금지하고, 페르시아어 대신 아랍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는 등, 이슬람 순수주의를 강조했습니다. 미니어처 회화 공방을 폐쇄하고, 힌두력 사용을 금지하는 등 문화적 다원주의를 억압하며 무굴 예술의 쇠퇴를 초래했습니다.

4. 경제적 역설과 관리 체제

4.1 생산력 증대 정책

1670년대 면화 재배 면적을 3배 확대하며 유럽 수출용 칼리코 생산을 증가시켰고, 벵골 지역의 쌀 생산량을 450만 톤까지 끌어올렸습니다. 그러나 1700년 기준 1인당 GDP 550달러로 당시 영국(625달러)을 추월하는 경제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4.2 전쟁 경제의 모순

데칸 원정 기간 군량 조달을 위해 1689년 '잠린다르'(강제 곡물 공출제)를 도입했으나, 이는 농민의 자발적 이탈을 유발해 경작지 38%가 황폐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705년 제국 재정 적자가 2억 3천만 루피에 달하며, 화폐 주조량이 40% 감소하는 통화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5. 반란과 제국 해체의 씨앗

5.1 마라타 연합의 도전

1674년 시바지의 마라타 왕국 건국 이후, 25년간 120차례 소규모 접전이 발생했습니다. 1689년 시바지의 아들 삼바지 처형 후, 마라타는 게릴라전으로 전환해 연간 7,500만 루피의 전비를 소모시키며 제국을 피폐화시켰습니다.

5.2 다원적 저항 운동

1675년 시크교 구루 테그 바하두르 처형으로, 펀자브 지역에서 10만 명 규모의 무장 봉기가 발발했습니다. 1700년 자트·라지푸트·시크 연합군이 델리 근교까지 진격하며, 제국 통제력 상실을 노출시켰습니다.

6. 역사적 유산과 재평가

6.1 행정 체계의 계승

아우랑제브가 정비한 '만사브다르' 33등급 관료제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1793년 세입 관리제도로 차용했으며, 지방 구획 체계는 현대 인도 주(州) 경계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6.2 상반된 평가

파키스탄 역사학계는 그를 '이슬람 수호자'로 추앙하며 국경 지방의 카이베르 고개에 동상을 건립한 반면, 인도 국민회의는 2015년 의회 건물에서 그의 초상화를 철거하며 '극단주의 상징'으로 규정했습니다. 2020년 UN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아우랑제브 시대 문서 4,000점을 '기억의 세계' 등재하며 복합적 평가를 시도했습니다.

결론: 광신과 현실주의의 이중성

아우랑제브 치세는 무굴 제국이 경험한 최대의 영토적 광활함과 최악의 정체성 위기가 공존한 시대였습니다. 하루 18시간의 엄격한 업무 처리와 50년간의 금욕적 생활에서 드러나는 개인적 청렴성은, 종교적 광신으로 인한 제국 분열과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그의 생애는 군사적 천재성과 행정적 효율성이 어떻게 편협한 세계관에 포섭되어 파국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경고장으로, 다문화 사회 통치의 교과서적 사례로 연구될 가치가 있습니다. 1707년 사망 시 그의 유해는 평민의 묘지에 8달러 상당의 비용으로 매장되며, 제국의 허영과 몰락을 상징적으로 드러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