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초기 활동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은 1872년 11월 3일 영국 브리스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한국명으로 배설(裵說)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베델의 아버지 토머스 핸콕 베델(Thomas Hancock Bethel)은 양조회사 서기와 회계원 등을 거쳐 극동지방을 상대로 하는 무역업에 종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베델은 1885년부터 1886년까지 브리스틀의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Merchant Venturers School)을 다녔는데, 이 학교는 당시 브리스톨의 상인조합이 운영하던 실업전문학교로 훗날 브리스틀대학으로 발전했습니다.
16세인 1888년, 베델은 아버지의 요청으로 일본 고베로 건너가 무역업 실무를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일본에 세운 무역회사에서 일본산 도자기, 골동품, 칠기, 장신구 등을 취급하며 영국으로 수출하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1896년에는 아버지와 여러 무역업자들이 설립한 회사의 고베지점을 운영했고, 1899년에는 동생 허버트와 함께 '베델 브러더스 무역상'을 설립하여 고베와 요코하마에 사무소를 두고 활동했습니다.
베델은 1900년 마리 모드 게일(Mary Maude Gale)과 결혼하여 외아들 허버트 오웬(Herbert Owen)을 낳았습니다. 무역업과 함께 고베에 양탄자 공장을 설립하는 등 사업을 확장했지만, 일본 업체들의 담합과 소송에 휘말리면서 사업이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1904년 한국에 오기 직전에는 양탄자 회사가 거의 파산상태에 직면했고, 무역업에서도 손을 뗀 상황이었습니다.
한국과의 인연
러일전쟁 특파원으로 입국
베델의 인생에 일대 전환점이 된 것은 1904년 2월에 발발한 러일전쟁이었습니다. 영국 신문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이 전쟁 취재를 위해 베델을 임시직인 특별통신원으로 조선에 파견한 것이 한국과의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베델은 1904년 3월 10일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베델이 조선에 온 지 1개월여가 지난 4월 14일 저녁, 고종이 머물던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의문의 화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베델은 이 사건을 추적하여 '일본군이 방화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특종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데일리 크로니클』은 4월 16일자에 '조선 황궁의 화재'라는 제목으로 이 기사를 톱기사로 보도하여 전 세계에 타전했습니다.
하지만 이 특종 기사는 베델에게 해고 통보를 안겨주었습니다. 친일 성향의 『데일리 크로니클』이 일본에 비판적인 기사를 쓴 베델을 문책했고, 영국과 일본이 1902년 영일동맹을 맺고 있던 상황에서 양국 관계 악화를 우려한 영국 정부의 압력도 작용했을 것으로 분석됩니다.
운명적 만남 - 양기탁과의 협력
해고된 베델은 중국과 일본에는 영자신문이 여럿 있는데 조선에는 하나도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한·영 양국어 신문을 창간할 생각을 했습니다. 이때 베델을 도와준 인물이 양기탁(1871~1938)이었습니다.
양기탁은 평양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한 뒤, 15세인 1886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다양한 학문을 접했습니다. 나현태에게 성리학을 수학하고,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으며, 1895년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스카이 게일의 한영사전 편찬에도 참여했습니다. 일본 나가사키현에서 2년간 한국어 교사로 일하며 일본어도 익힌 그는 3개 국어에 능통했습니다.
양기탁은 왕실 문서를 번역하는 정부기관 '예식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덴마크인 전기기술자 헨리 예센 뮐렌스테트의 소개로 베델의 통역사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베델이 신문사 창간에 뛰어들면서 양기탁은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었고, 결국 1904년 8월 23일 예식원을 그만두고 베델을 돕기 위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포기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 창간과 언론 활동
신문 창간의 의미
베델과 양기탁은 1904년 7월 18일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데일리뉴스(Korea Daily News)』를 창간했습니다. 이는 한국 언론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국한문판, 순한글판, 영문판의 3가지 종류로 발행되어 다양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베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이는 일본의 검열을 피할 수 있는 결정적 장점이었습니다. 신문사 건물에는 "당사에 개와 일본인은 출입을 금한다"는 간판을 걸어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항일 언론 활동
『대한매일신보』는 신채호, 박은식 등 저명한 민족주의 운동가들을 주간으로 영입하여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민족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글들을 실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의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실어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는데, 『대한매일신보』는 장지연의 행동을 찬양하고 호외까지 발행해서 일본을 규탄했습니다.
1907년에는 고종이 "황제가 을사조약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을사늑약 무효 국서를 서구 여러 나라로 보냈는데, 이것이 영국의 '트리뷴'지에 실렸고 『대한매일신보』도 이 밀서 사진을 게재하여 일본의 강제성을 국제사회에 알렸습니다.
신문의 발행 부수는 1907년에 1만부를 넘어 당시 최대 신문사가 되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의 본부 역할을 하기에 적합한 본거지가 되었고, 민중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의 중심
일본이 조선의 국채를 보상했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경제를 예속시켜 식민지 건설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자, 이를 막기 위해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해 이 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하며 애국운동과 민족계몽을 위한 신교육을 알리는 일에 큰 이바지를 했습니다.
경천사지십층석탑 보호
베델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경천사지십층석탑의 보호입니다. 1907년 일본인 다나카 등이 개성의 경천사에 있던 이 석탑을 비밀리에 일본으로 빼돌리려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베델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1907년 3월 7일 이를 특종 보도했습니다.
베델의 보도로 인해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의 독자들도 문화재 약탈 소식을 알게 되었고, 일본인들에게도 이 사실에 대한 반발심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결국 1918년 일본은 이 석탑을 경복궁으로 다시 돌려보내게 되었습니다. 현재 국보 제86호로 지정된 경천사지십층석탑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일제의 탄압과 시련
집요한 추방 공작
베델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일본은 그를 제거하기 위해 집요한 추방 공작을 벌였습니다. 제1차 추방 운동이 실패하자 일본 제국 통감부는 동맹국이던 영국에 압력을 가했습니다. 베델은 1907년 10월과 1908년 6월 두 차례나 재판정에 서야 했습니다.
1908년 경성의 영국 총사령관에 설치된 법정에서 열린 두 번째 재판에서 영국인 판사 F. S. A. 본은 베델에게 3주간 금고에, 만기 후 6개월간 선행 보증금으로 피고인 1,000달러, 보증인 1,000달러를 즉시 납부하라고 판결했습니다. 베델은 상하이에 호송되어 3주간 금고 생활을 마치고 1908년 7월 경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양기탁에 대한 탄압
일본은 세 번째 탄압 수단으로 『대한매일신보』사 총무 양기탁을 국채 보상금을 횡령했다는 죄명으로 탄압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양기탁의 무죄가 선언되어 이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무자비하고 강압적인 압력을 가하여 두 사람을 『대한매일신보』사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베델은 『대한매일신보』사 사장직을 자신의 비서였던 앨프리드 W. 마넘(萬咸, Alfred W. Marnham)에게 맡기고서 계속 활동했습니다.
죽음과 유언
일제의 끊임없는 위협과 재판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베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매사 솔직하고 직설적이었으며 성질이 급했고,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성격에 술고래이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성격과 계속된 스트레스가 건강 악화를 가속화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베델은 1909년 5월 1일 심장비대증으로 37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죽으면서 양기탁의 손을 잡고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베델의 서거 후 그는 서울 한강변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박은식은 "하늘이 공을 보내고 또다시 데려갔구나. 구주(유럽)의 의혈 남아가 조선의 어둠을 씻어 내고자 삼천리 방방곡곡에 신문지를 뿌렸네. 꽃다운 이름 남아서 다함없이 비추리"라는 애도의 글을 바쳤습니다.
역사적 평가와 기념
독립유공자 포상
대한민국 정부는 베델의 독립운동 업적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이는 해외 독립유공자로는 처음으로 받은 최고 등급의 포상이었습니다. 1995년에는 주한 영국대사관에서 베델을 기리는 현판도 제막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베델 선생의 손녀인 수전 제인 블랙 여사가 할아버지의 유품을 한국 정부에 기증하기도 했으며, 해외 독립유공자로는 처음으로 국가유공자 명패를 손녀의 자택에 달게 되었습니다.
기념사업
2023년 2월, 국가보훈처는 한·영 수교 140주년을 맞아 베델의 출생지인 영국 브리스틀에 베델의 동상을 건립할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영국에 한국 독립운동가의 동상이 건립되는 것은 처음이며, 이는 베델의 업적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의미 있는 사업입니다.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현재의 서울신문으로 이어졌으며, 서울신문사 1층 로비에는 베델과 양기탁의 흉상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어 두 사람의 우정과 협력을 기리고 있습니다.
베델의 사상과 신념
베델은 일본에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조선으로 건너와서도 프리메이슨 설립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프리메이슨은 종교적 의미보다는 친목과 자선을 위한 형제공동체적 성격이 강했다고 평가됩니다.
베델의 활동은 단순한 언론인의 역할을 넘어섰습니다. 그는 고종황제로부터 "배설(裵說)"이라는 한국명을 받았고, 대한제국 외무아문 자문관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특히 그가 영국인이라는 신분을 활용하여 일제의 침략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주력한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전략적이고 효과적인 접근이었습니다.
베델 정신의 현대적 의미
어니스트 베델은 자신의 조국이 아닌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국제적 연대 정신의 상징입니다. 그의 삶과 활동은 정의와 진실을 위해서라면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 연대가 가능함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입니다.
베델이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추구한 것은 단순한 반일 감정이 아니라 약소국의 주권과 민족자결권에 대한 옹호였습니다. 그는 언론을 통해 진실을 알리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참된 언론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베델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언론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진실을 추구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베델의 정신은 현대 언론인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맺음말
어니스트 베델은 37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특히 한국에서 활동한 5년이라는 기간 동안 한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영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살았고,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생명을 바쳤습니다.
베델의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는 유언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정신은 『대한매일신보』에서 현재의 서울신문으로 이어져 한국 언론사에 계속 살아 숨 쉬고 있으며, 그가 보호한 경천사지십층석탑은 국보로 지정되어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베델의 삶과 죽음은 진정한 국제주의와 인류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적 교훈입니다. 그는 단순히 한국을 도운 외국인이 아니라, 정의와 진실을 위해 살다 간 참된 인간의 표본이었습니다. 우리는 베델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