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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도호 사건 결말 : 1970년 일본 적군파가 민항기를 납치하여 북한으로 망명한 국제적 항공 테러 사건의 최종 결과

by jisiktalk 2025. 10. 31.

요도호 사건은 1970년 3월 31일 일본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9명이 일본항공 351편을 납치하여 북한으로 망명한 충격적인 항공 테러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79시간에 걸친 한일 양국의 치밀한 협상과 한국의 기지 넘치는 작전을 통해 승객과 승무원의 생명을 구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건의 전개 과정과 김포공항 착륙

1970년 3월 31일 오전 7시 33분,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후쿠오카로 향하던 일본항공 351편 '요도호'가 일본 적군파 9명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납치범들은 일본도와 권총, 폭탄 등으로 무장한 것처럼 보였지만, 후에 밝혀진 바로는 모두 장난감이었습니다.

납치범들은 처음에 쿠바로 갈 것을 요구했으나, 국내선 비행기의 연료 부족으로 불가능하자 목표를 북한으로 변경했습니다. 이시다 신지 기장은 연료 보충을 핑계로 후쿠오카 이타즈케 공항에 착륙하여 노인과 어린이 등 승객 23명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후 1시 59분 후쿠오카를 이륙한 요도호는 평양을 향해 비행했지만, 한국 정부의 치밀한 작전에 의해 김포공항에 착륙하게 됩니다. 한국 공군 관제사 채희석은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 지시를 받아 요도호를 김포공항으로 유도하는 극비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79시간의 협상과 야마무라 차관의 희생

요도호가 3월 31일 오후 3시 15분 김포공항에 착륙한 후, 한국 정부는 김포공항을 평양으로 위장하는 작전을 펼쳤습니다. '적군파 평양 도착 환영'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북한 인민군복을 입은 한국군을 배치했지만, 납치범들은 창문 너머로 흑인 미군을 발견하고 평양이 아님을 알아차렸습니다.

이후 79시간에 걸친 치열한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정부에서는 정래혁 국방부 장관, 백선엽 교통부 장관, 박경원 내무부 장관이 협상에 참여했고, 일본에서는 야마무라 신지로 운수성 정무차관이 급파되었습니다.

야마무라 차관은 공직자로서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주며, 자신이 인질이 되는 조건으로 승객 전원의 석방을 성사시켰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용기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최종 결말과 북한 도착

79시간의 대치 끝에 4월 3일 오후 6시 5분, 적군파 9명과 조종사 3명, 그리고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 등 13명을 태운 요도호는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북한으로 향했습니다. 1시간 30분 후인 오후 7시 20분, 요도호는 평양 미림 비행장에 착륙했습니다.

당시 미림 비행장에는 야간 항공등화시설이 없어 이시다 기장이 2차 대전 당시의 야간 특공대 경험을 살려 육안으로 야간 착륙을 성공시켰습니다. 북한 당국은 무장해제를 요구했고, 납치범들이 소지한 무기들이 모두 장난감임이 밝혀졌습니다.

북한은 처음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범인들을 제외한 승무원과 기체는 송환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요도호 도착 후 입장을 번복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하자 결국 4월 5일 야마무라 차관과 승무원 3명을 요도호에 태워 일본으로 송환했습니다.

적군파의 북한 생활과 그 후

북한에 망명한 적군파 9명은 이후 다양한 운명을 맞았습니다. 리더격이었던 다미야 다카마로는 1995년 11월 향수병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날까지 건강했다고 전해져 의문사 설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요시다 긴타로는 1985년, 오카모토 다케시는 1988년 각각 사망했습니다. 시바타 야스히로는 1998년 일본에 밀입국하여 공작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5년형을 살고 출소했으나, 2011년 일본에서 병사했습니다. 다나카 요시미는 태국에서 위조달러 혐의로 체포되어 일본으로 송환되었습니다.

현재 북한에는 4명의 적군파와 그들의 일본인 처, 그리고 20여 명의 자녀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의 자녀들은 일본으로 귀국하여 일본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채희석 관제사의 비극적 결말

요도호를 김포공항으로 유도한 일등공신 채희석 관제사의 사후 처리는 매우 냉혹했습니다. 사건 3일 후 공군 본부로부터 "앞으로 요도호 사건 이야기를 하지 마라. 입을 열면 쏴 죽이겠다"는 협박성 통보를 받았습니다.

채희석 관제사는 이후 모든 관제 업무에서 배제되었고, 억울함을 안고 1971년 6월 30일 8년 7개월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했습니다. 제대 후에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약 10년간 술독에 빠져 지내며 아내의 벌이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약 20년 후 그의 딱한 처지를 알게 된 유엔군 사령부 고위관리의 도움으로 비무장지대(DMZ)에서 토산물 가게를 운영할 수 있게 되어 그제서야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채희석 관제사는 2021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공개 증언을 통해 당시의 진실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영향

요도호 사건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일본 최초의 항공기 납치 사건으로 기록되며, 이후 항공보안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둘째, 한국 정부의 기지 넘치는 작전으로 100여 명의 생명을 구한 인도주의적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셋째, 한일 외교관계에서 한국이 일본에 큰 은혜를 베푼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백선엽 장군이 일본어로 직접 협상에 나서 물꼬를 튼 것도 주요한 성과였습니다.

넷째, 1960년대 말 일본의 급진적 학생운동과 좌익 무장투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적군파는 "세계혁명"과 "무장봉기"를 주장하며 테러 활동을 벌인 대표적인 극좌 무장조직이었습니다.

현재적 관점에서의 평가

요도호 사건은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테러와의 협상에서 인질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인도주의적 접근의 중요성을 보여주었으며, 국제공조의 필요성도 입증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2025년 넷플릭스 영화 '굿뉴스'의 소재로 활용되어 현대에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영화는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재현하며, 잊혀져가는 역사적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요도호 사건의 최종 결말은 적군파 9명의 북한 망명, 승객과 승무원의 전원 무사 귀환, 그리고 이 과정에서 헌신한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채희석 관제사와 야마무라 차관의 희생정신은 오늘날에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으며, 위기 상황에서의 인간의 숭고한 면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적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