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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옥의 난: 함길도 도절제사의 권력 부당 처사 반발 반란

by jisiktalk 2025. 10. 21.

조선 단종 원년(1453년), 함길도 도절제사로 부임했다가 파직당한 이징옥(李澄玉)이 중앙 권력의 부당한 처사에 반발하여 일으킨 대규모 반란으로, 수양대군 일파의 권력 장악에 대한 저항이자 변방 사회의 차별과 부패 문제를 폭로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배경

이징옥은 본관 인천 출신으로 세종·문종·단종 연간에 걸쳐 4군·6진 개척과 여진 토벌에 뛰어난 무공을 세워 변방 수비의 핵심 무관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나 계유정난 이후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세조)은 김종서·황보인 등의 숙청을 단행하며 이징옥에게도 불신을 드러내어 함길도 도절제사 직위에서 파직하고 박호문을 후임으로 임명했습니다.

 

파직 통보를 받은 이징옥은 분개하여 한양으로 향하던 중 회군하여 박호문을 살해하고, 북쪽 종성(鍾城)으로 진격했습니다.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칭하며 옛 금나라 수도 오국성(五國城)을 도읍으로 정하고, 여진족에게 후원을 요청하는 등 중앙 정부 전복과 단종 복위를 목표로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전개

6월 중순 이징옥은 종성에 주둔하던 병력을 규합하여 관아를 점령하고, 중앙 관리와 관료 주택을 급습하여 일시적으로 함길도 일대를 장악했습니다. 이후 함경 일대 주민과 하급 관리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명분을 확산했으나, 조직적 기반이 취약하여 장기전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수양대군은 즉각 토벌군을 편성하여 각지에 협공 작전을 발표하고, 반란군에 가담한 자에겐 항복을 권고하며 포상을 약속했습니다. 경상우병마절도사 이항복과 황해도 관찰사 김안국 등이 협력하여 토벌군 주력을 이끌었으며, 7월 중순 함흥부 북쪽 삼포촌(三浦村) 부근에서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진압과 처형

이행검(李行儉)·정종(鄭種) 등의 내부 배신으로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 토벌군이 기습을 감행했습니다. 이징옥은 오른팔이 절단된 상태에서도 수십 명의 적을 베며 사투를 벌였으나, 결국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고 추격병에게 암살되었습니다. 이징옥과 그의 세 아들은 거열형(車裂刑)을 당해 시신이 찢겨졌으며, 목은 효수된 뒤 한양으로 보내져 조정에 효수되었습니다.

영향 및 평가

이징옥의 난은 중앙집권 체제 속 변방의 모순과 차별, 세조 정권의 부패와 권력 남용을 극명히 드러냈습니다. 반란 직후 조정은 함경도 지역에 대한 통제 강화와 인원 보강, 세무조사 및 토착 관리 감독을 대폭 강화하여 유사 사태 재발을 방지하려 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북방 지역에서 발생한 최초의 대규모 반란으로, 이후 1467년 이시애의 난을 예고한 선구적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조선 후기 명재상 채제공(蔡濟恭)은 『번암집(樊巖集)』에서 이징옥의 난을 단종 복위를 위한 구국 운동으로 해석하며, 대금황제 자칭은 세조 정권에 대한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 교훈

이징옥의 난은 중앙과 지방 간 권한 갈등, 부당한 세금 징수와 부패한 관리 처벌 문제, 변방 지역의 행정 취약성이 복합적으로 얽혀 발생한 사건입니다. 오늘날에는 공정 행정과 지방 분권, 주민 민생 안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사적 교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