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鄭寅普, 1893-1950)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한학자·역사학자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식민지 현실에 맞선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1910년대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한 그는 1920-30년대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주창했고, 양명학 연구를 통해 주체적 역사관을 정립했다. 1945년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감찰위원장을 역임했으나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생애를 마감한 그의 행적은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도덕적 고뇌와 민족주의적 실천을 응축적으로 보여준다.
가문 배경과 학문적 기반
소론 명문가의 후예
동래 정씨 소론 계열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정인보는 철종 대 영의정 정원용의 증손으로, 조선 후기 관료 엘리트의 혈통을 이었다. 13세 시절 이건방에게 사사하며 강화학파의 학맥을 계승했는데, 이건방은 정제두의 양명학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이러한 학적 배경은 훗날 그가 『양명학연론』을 집필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중국 유학과 독립운동
1910년 한일병합 직후 상해로 건너간 그는 신채호·박은식·신규식 등과 동제사를 조직하며 본격적인 항일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장병린의 국학사상에 영향을 받으며 민족문화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나, 1913년 부인 성씨의 사망으로 귀국해야 했던 개인적 비극을 겪었다. 이 경험은 그가 이후 검은 옷차림으로 일관하며 "나라 잃은 슬픔"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족정신의 각성과 학문적 실천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
1923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한 그는 『동아일보』·『시대일보』에서 "조선고전해제" 연재를 통해 『성호사설』·『여유당전서』 등 조선 후기 실학 텍스트를 재발견했다. 1935년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기해 안재홍 등과 『여유당전서』 교열 간행을 주도하며 실학 연구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는 "실학" 개념 정립의 시발점이 되었다.
양명학의 재해석
1933년 『동아일보』에 66회 연재한 『양명학연론』에서 그는 주자학의 관념적 틀을 비판하며 양명학의 실천철학을 강조했다. 특히 장유·정제두·홍대용 등 조선 양명학자의 계보를 재구성하며 "의실구독지학(依實求獨之學)"이라는 독자적 학문관을 제시했다. 이 작업은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에 맞선 정신적 저항으로 읽혔다.
역사인식의 혁신: 조선사연구
식민사관에 맞선 도전
1935년 시작된 "오천년간 조선의 얼" 연재는 단군조선부터 조선왕조까지 민족정신의 연속성을 강조한 역작이었다. 일제가 『조선반도사』를 통해 역사왜곡을 시도하자 맞서 집필한 이 글은 1935년 11월 총독부에 압수되는 등 격렬한 탄압을 받았다. 그는 여기서 "사람의 얼은 스스로 잃어버리는 것"이라며 정신적 각성을 촉구했다.
학문적 체계화
1946년 간행된 『조선사연구』 상·하편은 고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를 주체적 관점에서 재구성한 결과물이다.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을 계승하면서도 엄밀한 사료 분석을 강조한 점이 특징이며,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는 대안적 역사서술로 평가받았다. 이 저작에서 그는 역사의 흐름을 "민족적 얼"의 구현 과정으로 해석하며, 사대주의적 태도를 조선사 최대의 폐해로 지적했다.
광복 이후의 행적과 역사적 평가
정치적 실험과 좌절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초대 감찰위원장으로 취임한 그는 관료 부패 척결에 전념했으나, 이승만 정권과의 마찰로 1년 만에 사임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 당시 친일 청산의 불완전성을 예리하게 지적하며 "역사적 정의" 구현을 요구하기도 했다.
납북과 유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된 그는 황해도에서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2023년 UN 인권이사회는 그의 사상을 "식민지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 언급했다. 현재 『양명학연론』 원고는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24년 국내 학계에서 그의 조선학 방법론 재조명 움직임이 활발하다.
결론: 미완의 정신적 유산
정인보의 생애는 식민지 지식인이 겪은 딜레마와 투쟁의 초상이다. 양명학의 실천철학과 실학의 현실인식을 결합한 그의 학문은 단순한 역사 연구를 넘어 민족정신의 각성 운동이었다. 『조선사연구』에서 보인 주체적 역사관은 오늘날 동아시아 역사 분쟁 속에서도 유효한 분석 도구로 기능하며,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 제기한 정체성 문제는 21세기 한국사회의 문화적 자기인식에 지속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의 유산은 역사 연구와 현실 참여의 경계에서 고뇌하는 현대 지식인에게 여전히 강력한 영감원으로 작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