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레스(Ceres)'라는 이름은 고대 신화 속에서 두 가지의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풍요와 농업, 곡물의 여신을 가리키는 이름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 신화에서 폭력적인 죽음을 관장하는 여신들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케레스는 생명을 관장하는 자애로운 여신의 모습과 죽음을 가져오는 파괴적인 여신의 모습을 모두 아우르는 이름으로, 고대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신화적 존재입니다. 본문에서는 로마 신화의 케레스와 그리스 신화의 케레스에 대해 각각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로마 신화의 케레스: 풍요와 농경의 여신
로마 신화에서 케레스는 농업, 곡물, 다산 그리고 모성애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여신입니다. 그녀는 그리스 신화의 데메테르와 동일시되며, 사투르누스(크로노스)와 옵스(레아)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케레스는 로마의 수많은 농업 관련 신들 중에서 올림포스 12신에 해당하는 '디 콘센테스(Dii Consentes)'에 포함된 유일한 농업의 신이기도 합니다. 로마인들은 케레스를 통해 풍요로운 수확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했으며, 특히 평민 계층의 수호신으로 여겨졌습니다.
딸 프로세르피나 신화와 계절의 기원
케레스와 관련된 가장 유명한 신화는 그녀의 딸 프로세르피나(그리스 신화의 페르세포네)의 이야기입니다. 지하 세계의 신 플루토(하데스)가 아름다운 프로세르피나에게 반해 그녀를 납치하여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케레스는 깊은 슬픔에 잠겨 온 세상을 헤매며 딸을 찾아다녔고, 이로 인해 대지는 황폐해지고 곡식은 더 이상 자라지 않았습니다. 인류가 굶주림으로 고통받자, 신들의 왕 유피테르(제우스)가 중재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프로세르피나는 일 년의 절반은 지상에서 어머니 케레스와 함께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지하 세계에서 남편 플루토와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신화는 딸이 지상으로 돌아오는 봄과 여름에는 대지가 풍요로워지고, 딸이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가을과 겨울에는 대지가 황량해지는 계절의 순환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숭배와 축제: 케레알리아
로마에서 케레스는 국가적인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그녀를 기리기 위한 다양한 축제가 열렸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축제는 매년 4월에 열리는 '케레알리아(Cerealia)'였습니다. 이 축제 기간에는 시민들이 신전에 곡물을 바치며 풍년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고, 다양한 경기(Ludi Ceriales)가 함께 열렸습니다. 특히 케레알리아 축제에서는 불붙은 횃불을 등에 단 여우들을 풀어놓는 독특한 의식이 있었는데, 이는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해충과 불운을 쫓아내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또한 케레스는 평민을 위한 법의 수호자로 여겨졌으며, 법을 어긴 자는 재산과 생명을 몰수당하기도 했습니다.
상징과 유산
케레스는 예술 작품에서 주로 밀 이삭이나 양귀비로 만든 화관을 쓰고, 한 손에는 횃불이나 곡식을 든 성숙한 여성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때로는 풍요의 뿔(Cornucopia)을 들고 있거나 뱀이 끄는 마차를 탄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침 식사로 먹는 '시리얼(cereal)'이라는 단어는 바로 여신 케레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또한, 왜소행성 '세레스(Ceres)'와 원소 '세륨(Cerium)' 역시 그녀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녀는 시칠리아 섬의 수호신이기도 했는데, 유피테르에게 부탁하여 하늘에 시칠리아 섬 모양의 삼각형자리를 만들었다는 신화도 전해집니다.
그리스 신화의 케레스: 죽음과 파멸의 여신들
그리스 신화에서 '케레스(Keres)'는 로마 신화의 케레스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폭력적이거나 비참한 죽음을 상징하는 여신들을 의미합니다. '케레스'는 '운명' 또는 '파멸'을 뜻하는 '케르(Ker)'의 복수형입니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 따르면, 이들은 밤의 여신 닉스가 남성과의 관계 없이 혼자 낳은 딸들입니다. 케레스는 운명의 신 모로스, 죽음의 신 타나토스, 불화의 신 에리스 등과 남매지간으로, 모두 추상적인 개념이 의인화된 신들입니다.
역할과 묘사
케레스는 평화로운 죽음을 관장하는 타나토스와 달리, 전쟁터나 질병으로 인한 잔혹한 죽음을 관장합니다. 이들은 검은 옷을 입고 날카로운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피로 물든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케레스는 전쟁터 위를 배회하며 죽어가는 전사들을 발견하면 날카로운 발톱으로 움켜쥐고 지하 세계인 타르타로스로 끌고 갔다고 전해집니다. 부상당한 병사를 산 채로 붙잡아 가기도 하는 등 무자비하고 사악한 존재로 그려졌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북유럽 신화에서 전사자들을 발할라로 이끄는 발키리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영광스러운 죽음을 안내하는 발키리와는 달리 케레스는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죽음의 전령으로 묘사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케레스'라는 단어는 '선택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발키리'의 어원이 된 고대 노르드어 '키르야(kyrja)'와 의미 및 발음이 유사하다는 언어적 관련성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신화 속 등장과 의식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서 케레스는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최후의 결투를 벌일 때, 제우스는 황금 저울의 양쪽에 두 영웅의 '케레스', 즉 죽음의 운명을 올려놓고 누가 죽을 것인지를 결정했습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케레스가 죽음과 질병을 몰고 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매년 '안테스테리아' 축제 기간에 집에서 케레스를 쫓아내는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케레스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파멸과 죽음의 공포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