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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소스 궁전 : 기원전 2000년경 크레타섬에 건설된 유럽 최고(最古)의 도시이자 미노아 문명의 정치·종교·경제적 중심지

by jisiktalk 2025. 10. 19.

크노소스 궁전은 그리스 크레타섬에 위치한 청동기 시대의 가장 웅장한 유적지로, 유럽 문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역사적 장소입니다. 기원전 7000년경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이곳은 기원전 2000년경 본격적인 궁전이 건설되면서 미노아 문명의 심장부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1,500개가 넘는 방으로 구성된 이 거대한 건축물은 단순한 왕의 거처를 넘어 행정 관청, 공방, 시장, 종교 시설을 모두 갖춘 복합 도시 국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스 신화 속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으로도 유명한 크노소스 궁전은 오늘날까지도 고대 문명의 찬란함을 증언하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크노소스 궁전의 역사적 배경

크노소스의 역사는 기원전 7000년경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25명에서 50명 규모의 작은 공동체가 케팔라 언덕에 정착하여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습니다. 초기 정착민들은 진흙과 가로막이를 사용한 초가집에 거주하였으며,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7030년에서 6780년 사이의 연대가 확인되었습니다. 이곳은 크레타 섬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정착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신석기 초기인 기원전 6000년에서 5000년 사이에 크노소스는 200명에서 600명 규모의 마을로 성장하였습니다. 주민들은 방이 한두 개인 집에서 거주하였으며, 진흙 벽돌로 벽을 쌓고 자연석을 주춧돌로 사용하였습니다. 신석기 중기인 기원전 5000년에서 4000년에는 인구가 500명에서 1000명으로 증가하였고, 건축 방식도 더욱 정교해져 목재 창호와 고정된 화로를 갖춘 가옥들이 등장하였습니다. 특히 100평방미터 넓이에 벽 두께가 1미터에 달하는 2층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어 공동체 또는 공공 용도의 건물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기원전 2000년경 미노스 시대 중기 초반에 이르러 크노소스에 최초의 궁전이 건설되었습니다. 이 시기 크레타 섬의 말리아, 파이스토스, 자크로에도 궁전이 세워졌으며, 이는 이전까지 일반적이었던 신석기 촌락 형태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었습니다. 궁전의 건축은 부의 증대와 정치적·종교적 권위의 집중을 시사하며, 유프라테스강 상류의 마리나 시리아 해안의 우가리트 궁전처럼 동방의 모델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궁전의 건축과 파괴의 역사

크노소스 궁전은 여러 차례의 파괴와 재건을 거쳤습니다. 최초의 궁전은 기원전 1700년경 크레타 섬에서 종종 발생하는 지진으로 인해 파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옛 궁전은 중앙 안뜰을 중심으로 서쪽, 북쪽, 동쪽 익랑 형태로 배치되었으며, 기원전 1800년에서 1700년 사이 빈번한 지진으로 여러 차례 손상을 입었습니다.

 

기원전 1650년경 궁전은 더욱 큰 규모로 재건되었으며, 이 두 번째 궁전의 시대인 기원전 1650년에서 1450년은 미노스 문명의 절정기였습니다. 새 궁전은 기원전 17세기부터 시작된 재건 사업을 통해 탄생하였으며, 기원전 1350년 무렵 궁전이 다시 파괴될 때까지 점진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시기 크노소스 궁전은 미노아 문명이 크레타와 에게 해 제도, 나아가 이집트와 시리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동안 정치·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기원전 1450년경 크레타의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말리아, 파이스토스, 자크로의 궁전들이 파괴되었지만, 크노소스 궁전만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1420년경 미케네 세력에 의해 크레타 섬이 정복되면서 크노소스도 그리스인의 점유 하에 들어갔습니다. 미케네식 석실묘가 도입되고 도기 양식에도 그리스 본토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은 기원전 1370년경까지 존속하다가 결국 파괴되었으며, 그 후에도 이 일대는 재차 점유되었으나 옛 영향력을 되찾는 일은 없었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의 건축적 특징

크노소스 궁전은 크레타에서 가장 큰 궁전으로, 중심 건물만 3에이커를 차지하며 개별 건물까지 합치면 5에이커에 이릅니다. 궁전은 약 1,500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복잡한 구조는 미로를 연상시킵니다. 모든 궁전에는 큰 중정이 있어서 공공 행사를 위해 쓰이거나 스펙터클의 장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중정 주변에 생활 공간, 창고, 행정 관서, 숙련공을 위한 작업 공간이 배치되었습니다.

 

궁전의 건축 기법은 매우 정교하였습니다. 기단과 벽돌 아래층은 석조로 되어 있고 전체는 들보와 기둥의 목구조로 건설되었습니다. 주요 구조는 굽지 않은 큰 흙벽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지붕은 나뭇가지 위에 두꺼운 진흙층을 얹어 평평하게 만들었습니다. 내부의 방에는 채광정을 두어 빛이 들게 하였으며, 일부 구역에서는 지붕에 구멍을 뚫어 5층 아래까지 자연광을 비추는 빛우물을 설치하였습니다.

 

장대한 계단이 1층에서 5층까지 직통으로 연결되어 위층의 응접실로 이어지며, 종교 의식 장소는 지상층에 배치되었습니다. 궁전의 저장소는 6개의 방을 점유하고 있으며, 이곳의 주된 특징으로 5피트 높이에 이를 정도로 큰 저장 항아리인 피토스가 있습니다. 피토스는 주로 기름, 양모, 포도주, 곡물을 저장하는 데 쓰였으며, 납을 칠한 함에는 작은 귀중품이 들어 있었습니다.

첨단 시설과 생활 문화

크노소스 궁전은 당대로서는 놀라운 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궁전은 욕실과 수세식 변소, 완벽한 배수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빗물을 처리하는 중수도 시스템까지 구비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하수도 시설은 3,500년 전 건축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것이었습니다. 바로크 시대나 가능했을 건축적 성취를 3,500년이나 앞서 크노소스가 달성했다는 점은 미노아 문명의 뛰어난 기술력을 증명합니다.

 

크노소스에는 400명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도 세워졌습니다. 극장의 연기 공간인 오케스트라는 후대 아테네의 원형 형태와 달리 직사각형이며, 종교 무용을 위해 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미노아 문명이 단순한 물질적 풍요를 넘어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는 고도로 발달한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

 

세로 홈이 새겨진 나무 열주는 지지대 역할을 하는 동시에 건물의 위엄을 세워주었으며, 방과 복도는 일상 생활과 행렬 장면을 그린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습니다. 궁전 내부는 다양한 꽃과 동물, 인물을 그린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으며, 이 시대 사람들의 옷차림은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성의 묘사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여성들은 머리를 정교하게 다듬고 주름 치마와 부푼 소매가 있는 긴 옷을 입었으며, 허리에 달라붙는 조끼를 입고 가슴을 노출하는 독특한 패션을 보여주었습니다.

프레스코화의 예술적 가치

크노소스 궁전의 프레스코화는 미노아 문명의 예술적 성취를 대표합니다. 크레타의 위대한 화가들은 인류 최초로 프레스코화를 발명하였으며, 이 기법은 회반죽을 벽에 바르고 미처 마르지 않아 축축하고 신선할 때 물에 녹인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고난도의 화법입니다. 매우 이른 시간 내에 완성해야 하는 이 기법은 3,000여 년 전에 개발된 이래 수천 년 동안 서양화의 중요한 기법으로 활용되었습니다.

 

16세기 초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화 '천지 창조'와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역시 프레스코 기법의 최고 걸작들입니다. 프레스코화의 최고 장점은 보존성이 좋다는 점으로, 유화가 수백 년 보존이 가능한 것에 비해 프레스코는 천 년 이상 원작의 생생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크노소스 궁전을 장식했던 수많은 벽화들을 아직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프레스코 기법의 덕분입니다.

 

크노소스 궁전의 프레스코화 중 미노아 문명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쓰이는 그림이 '백합꽃 왕자'입니다. 인물 주변에 백합이 그려져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전신 실물 크기의 그림입니다. 아서 에반스는 이 그림의 주인공이 크노소스의 통치자이거나 특별한 종교적 권위를 지닌 제사장일 것으로 추정하였으며, 일부 학자들은 운동선수 또는 군대 지휘관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주인공의 신분이 어떠했든 위엄과 당당함, 건장함이 넘치는 모습은 크레타 문명의 상징 이미지로 활용되기에 충분합니다.

 

궁전의 벽화는 밝고 선명한 색채로 가득 차 있으며, 동물, 자연, 신화적 요소들이 결합되어 미노아인의 세계관과 미적 감각을 반영합니다. 벽화에는 사냥, 농사, 종교적 의식 등이 그려져 있어 미노아인의 일상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미노타우로스 신화와 미궁 전설

크노소스 궁전은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미노타우로스 전설의 무대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크레타의 왕 미노스는 제우스의 아들로, 포세이돈에게 아름다운 황소를 제물용으로 하사받았지만 신들에게 바치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로 하여금 황소를 사랑하게 해 사람 몸에 소 머리를 얹은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미노스 왕은 건축의 신인 다이달로스에게 미노타우로스를 영원히 격리시킬 미궁을 지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다이달로스는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를 건설하였고, 미로의 주인인 미노타우로스는 인간 제물을 먹어 치웠습니다. 아테네 왕자 테세우스는 이 공공의 적을 살해하고 미로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은 천 개가 넘는 방들이 마치 미로처럼 배열되어 있어 미노타우로스가 갇혀 있다는 미궁을 연상시킵니다. 황소는 크노소스에서 발견되는 도기와 프레스코화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며, 궁전의 정교한 배치는 미궁을 연상하게 합니다. 흔한 의례 상징이며 궁전 벽에도 종종 보이는 양날 도끼는 라브리스라고 하는데, 이러한 형태의 도구나 무기를 가리키는 카리아어 낱말입니다. 바다가 자연 방어벽이기에 궁전에는 성벽이 없었으며, 외부는 개방적이지만 내부는 복합적이고 환상적이었습니다. 미개한 육지의 그리스인들이 크노소스를 미로라고 여길 만했던 것입니다.

선형문자의 발견과 문명의 해독

크노소스 궁전에서는 두 가지 고대 문자가 발견되었는데, 함께 발견된 픽토그램과 구분하기 위해 선형 A 문자와 선형 B 문자라고 각각 명명되었습니다. 1900년 아서 에반스에 의해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굴된 이 두 문자는 모두 선형적인 필기체이며, 주로 점토판에 기록되었습니다.

 

선형 A 문자는 미노아 상형문자와 달리 그림 문자가 적고 획과 곡선이 지배하는 기호로, 알파벳의 선구자 또는 메소포타미아의 설형 문자와 더 유사합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설형 문자가 막대기의 가장자리로 축축한 점토에 눌러지는 것과 달리 미노아 서기관은 필기 면에 글씨를 긁었습니다. 선형 A의 명문은 부기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작은 점토판에서 발견되었지만 동굴 성역이나 파이스토스와 크노소스의 대궁전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선형 B 문자는 선형 A 문자에서 파생되었으며, 마이클 벤트리스가 이 서판을 해독하고 이 언어가 이전의 선형 A와 상당히 다른 그리스어의 초기 형태임을 밝혀냈습니다. 점토판에 기록된 내용은 주로 재산 목록, 세금, 물품 이동, 인구 조사, 봉헌 기록 등 미케네 문명의 관료주의적 통치 체제를 보여줍니다. 선형 B의 해독은 미케네 문명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가능하게 했지만, 선형 A의 미해독은 여전히 미노아 문명의 많은 부분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음을 의미합니다.

아서 에반스의 발굴과 복원

크노소스 유적지는 1878년에서 1879년 겨울에 서쪽 건물의 일부를 발굴한 미노스 칼로케리노스에 의해 최초로 확인되었습니다. 이후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 경(1851~1941)과 그의 팀이 1900년에서 1913년, 1922년에서 1930년에 장기적인 발굴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크기는 원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으며, 에반스는 궁전의 여러 층위를 발굴하면서 이 궁전을 사용한 문명을 '미노스 문명'이라고 불렀습니다.

 

에반스는 미노스 문명 연구와 탐사에 일생을 바쳤으며, 신화에만 등장했던 크노소스의 실체를 발굴하고 흥분한 나머지 궁전 군데군데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였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성급한 복원을 치명적인 실수라고 비판하지만, 폐허의 궁전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적절한 실수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에반스는 자신이 전설의 왕 미노스의 문명을 발견했다고 선언하였으며, 크레타 문명을 신화 속 미노스 왕의 문명 즉 미노아 문명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발견 이후 크노소스 유적지는 발굴, 관광, 점령의 무대가 되었으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지중해 동부의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벌인 각국 정부의 본거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존 데이비스 에반스는 신석기 시대 유적을 찾기 위해 궁전 위의 구덩이와 참호에서 추가 발굴을 수행하였습니다.

미노아 문명의 무역과 영향력

크노소스의 번영은 일차적으로 크레타 현지에서 나는 기름, 포도주, 양모와 같은 자원을 개발한 덕분이며, 무역의 확대도 한 가지 요소가 되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전설에 나오는 크노소스의 왕 미노스가 해상 제국을 건설했다고 기록하였으며, 투키디데스는 이 전승을 받아들이고 미노스 왕이 해적을 평정하고 무역 흐름을 증대하며 에게 해의 많은 섬을 식민지로 삼았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고고학적 증거도 이 전승을 지지하는데, 미노스 문명의 도기가 이집트, 시리아, 아나톨리아, 로도스, 키클라데스 제도, 시칠리아, 그리스 본토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노스 문명은 로도스, 밀레토스, 사모스와 밀접한 연관을 가졌던 것 같으며, 크레타의 영향은 키프로스에서 발견된 최초의 문자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크레타 제품의 주요 시장은 키클라데스 제도였는데, 여기에서는 도기, 특히 돌 화병의 수요가 있었습니다.

 

그리스 본토에서도 전승이나 고고학적 조사 모두 크레타와 아테네의 강력한 연관을 보여주며, 미노타우로스 전설에서 아테네는 크노소스에 예속되어 공물을 바친다고 나와 있습니다. 미노아 문명은 고대 그리스 문명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예술, 건축, 무역 등 여러 분야에서 그리스 본토에 많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은 이러한 교류의 중심지로서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관광지로서의 크노소스 궁전

오늘날 크노소스 궁전은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인기 관광지입니다. 이곳은 고대 문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아름다운 자연을 동시에 제공하며, 많은 관광객들은 이곳을 통해 미노아 문명의 역사와 문화를 직접 경험할 수 있습니다. 관광객들은 궁전의 가이드를 통해 크노소스의 역사적 배경을 배우고 다양한 유적을 탐방할 수 있으며, 방문객을 위한 안내판과 정보 센터가 잘 갖춰져 있어 편리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교육적 가치도 지니고 있습니다. 많은 학교와 연구 기관에서는 이곳을 역사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며, 학생들에게 고대 문명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에서는 다양한 역사 탐방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이러한 프로그램은 참가자들에게 고대 미노아 문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제공하고 문화 교류의 장이 되고 있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은 미노아 문명의 역사적, 건축적, 신화적 중심지로서 고대 그리스의 문화적 유산을 잘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이곳은 단순한 유적지를 넘어 역사와 문화를 탐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로 자리 잡고 있으며, 앞으로도 크노소스 궁전은 그리스와 세계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을 유지할 것입니다. 유럽 최고의 도시이자 문명의 요람인 크노소스 궁전은 오늘날까지도 인류 역사의 위대한 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