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한강 『여수의 사랑』 줄거리 : 1995년에 발표된 첫 번째 단편소설집

by jisiktalk 2025. 5. 26.

한강 작가의 첫 번째 단편소설집 『여수의 사랑』은 1995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현재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주목받고 있는 한강의 초기 문학세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이 소설집은 여수의 사랑, 어둠의 사육제, 야간열차, 질주, 진달래 능선, 붉은 닻 등 총 6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실과 고통, 그리고 치유의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표제작 「여수의 사랑」의 줄거리

주요 등장인물과 배경

표제작인 「여수의 사랑」은 정선과 자흔이라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정선은 어린 시절 여수에서 가족과 함께 겪은 비극적 경험으로 인해 깊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일곱 살에 아버지에 의해 동반자살을 당하다가 동생을 잃고 혼자만 살아남은 과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처로 인해 정선은 여수라는 지명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며, 결벽증을 앓고 있다.

 

자흔은 두 살 무렵 여수발 서울행 통일호 열차 안에서 포대기에 싸인 채 발견된 고아로, 여수를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양부모 밑에서 자란 자흔은 성인이 된 후 집을 나와 1년씩 여러 곳을 전전하며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아왔다. 여수는 자흔에게 버려졌지만 원초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는, 언젠가는 돌아가야만 하는 마음의 고향이다.

갈등의 전개

두 사람은 서울에서 월세방 동거인으로 만나게 된다. 정선은 결벽증으로 인해 이전 동거인들이 모두 떠났고, 더 이상 아는 사람 중에서는 방짝을 구할 수 없어 외부 사람인 자흔을 찾게 된 것이다. 자흔은 정선의 삶에 허술하게 끼어들면서, 그녀의 결벽증을 흐트러뜨리는 존재가 된다. 정선에게 자흔은 모성애를 자극시키는 동시에 고통 그 자체가 되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정선의 결벽증은 주기적으로 증세가 심해지는데, 이때는 옆에 있는 사람 자체를 견딜 수 없어한다. 결국 정선은 자흔에게 나가라는 못할 말을 하게 되고, 자흔은 때가 되었다고 여기며 다음날 떠나겠다고 말한다. 정선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가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자흔은 자신의 물건들을 다 챙기지도 못한 채 이미 떠난 후였다.

여수로의 여정

자흔이 떠난 후 정선은 신기하게도 결벽증 증세가 사라진다. 정선은 자흔이 말했던 여수를 떠올리며, 마침내 서울발 여수행 기차에 몸을 맡긴다. 계속된 토악질에 헐어버린 위장과 목구멍의 고통을 견디며, 기차 안의 군상들과 창문을 내리치는 빗물만 멍하니 쳐다보면서 여수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정선이 그토록 경기나게 싫어하던 여수를 찾아 나선 것은, 어렵게 마음을 붙였던 자흔을 찾기 위해서였다. 여수는 정선에게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을 겪은 바닷가이자 진저리 나게 싫어하는 곳이었지만, 동시에 자흔을 통해 마주해야 할 과거의 공간이기도 했다.

다른 수록작들의 줄거리

「어둠의 사육제」

「어둠의 사육제」는 영진과 명환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진은 십육 동 십삼 층 작은 이모의 베란다방에 얹혀사는 젊은 여성으로, 가진 것은 없지만 희망을 안고 미래를 꿈꾸는 인물이다. 인숙이라는 고향 언니를 만나 전세방을 구해 살다가, 인숙이 전세금을 모두 빼내고 도망치면서 빈털터리가 된다.

 

명환은 교통사고로 아내와 뱃속의 5개월 태아를 잃고, 자신도 한 발 무릎 밑이 잘린 채 목발로 살아가야 하는 신세가 된 남자다. 그는 사고를 낸 가해자를 지켜보기 위해 같은 아파트의 다른 동으로 집을 사서 그들을 어둠 속에서 감시하며 소리 없는 복수를 한다. 가해자 가족이 견디지 못하고 이사를 간 후, 명환은 영진에게 자신의 아파트를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영진은 그가 죽을 것을 직감하고 거부한다. 결국 명환은 영진이 떠나는 날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기타 수록작들

「야간열차」는 동걸이 술에 취하면 항상 야간열차 노래를 부르는 이야기를 다루며, 「질주」에서는 인규가 힘이 없지만 병동에서 달리기 시작하는 결말을 보여준다. 이러한 작품들은 모두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다시 누군가를 향해 나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작품의 주제와 의미

상처와 치유의 변증법

『여수의 사랑』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는 상처의 근원지로 돌아가는 것을 통한 치유의 가능성이다. 한강은 이 작품에서 "상처의 시원지, 상처의 근원지를 마주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여수로 가는 것, 고향으로 가서 상처와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여수는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정선에게 여수는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아픔과 고통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상처의 근원지가 역설적으로 상처를 치유하게 해주는 사랑의 공간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여수의 사랑"이라는 제목의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관계의 실패와 희망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고통스러운 관계의 실패를 다루지만, 동시에 다시 관계를 시도하려는 희망을 보여준다. 정선이 고통스러운 증상의 발원지인 여수로 다시 향하게 된 것, 영현이 동걸을 홀로 보냈다가 뛰어가 야간열차를 탑승한 것, 인규가 힘이 없지만 병동에서 달리기 시작한 것 등의 결말이 이를 보여준다.

 

이들은 '우리'가 되는 데에 실패하지만 다시 '우리'가 되기 위해 출발하는 순간으로 소설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거나 위로함으로써 그 고통을 해소하는 건 어렵지만, 그럼에도 또 다른 실패와 고통을 감수하고 다시 시도할 수밖에 없는 것, 미련처럼 끈질긴 희망을 다시 갖게 되는 것이 이 소설집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결론

한강의 『여수의 사랑』은 상실과 고통을 겪은 인물들이 그 상처의 근원을 마주하면서 치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전반적으로 눅눅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지만, 작가는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어쭙잖은 위로보다는 침묵과 공감의 시선을 보내며, 궁극적으로는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작품집은 한강 특유의 서정적이고 시적인 문체로 인간 내면의 깊은 상처와 치유의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어, 현대 한국문학의 중요한 성취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