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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향약 : 율곡 이이가 황해도 해주지방에서 시행한 조선시대 가장 완벽한 향촌 자치 규약

by jisiktalk 2025. 10. 22.

해주향약은 조선시대 성리학자이자 개혁가였던 율곡 이이가 1574년부터 1577년 사이에 황해도 해주지방에서 제정하여 시행한 향촌 자치 규약입니다. 이 향약은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가장 널리 보급되었으며, 한국 향약의 역사에서 가장 완벽한 유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해주향약은 중국 송나라의 여씨향약과 퇴계 이황의 예안향약 등을 바탕으로 하되, 해주 지방의 실정에 맞게 체제와 내용을 훨씬 구체적으로 만든 독창적인 향약이었습니다.

해주향약의 역사적 배경

율곡 이이는 1574년 선조 7년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습니다. 당시 지방 사회는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웠고, 향촌의 질서와 풍속이 문란한 상태였습니다. 이이는 부임 직후 지역민을 위한 사창을 설치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향약을 실시하였습니다. 해주향약은 향토 연대 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지역 유생과 사족들이 권선징악과 상호부조를 통해 향사풍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되었습니다.

해주향약은 단일한 문서가 아니라 세 가지 유형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는 해주향약 자체이고, 둘째는 해주일향약속이며, 셋째는 사창계약속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지역 사회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해주향약의 4대 강목

해주향약은 여씨향약의 전통을 이어받아 네 가지 주요 덕목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첫 번째는 덕업상권으로, 좋은 일과 덕을 쌓는 일은 서로 권장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주민들이 효도, 충성, 우애, 공경 등의 유교적 덕목을 실천하도록 서로 격려하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과실상규로, 잘못과 과실은 서로 규제하고 타이른다는 뜻입니다. 이 조목은 해주향약에서 특히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으며,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형제간에 우애하지 못한 자, 상복을 입고 술에 취한 자 등 구체적인 악행들이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예속상교로, 예의에 맞는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 교류한다는 의미입니다. 네 번째는 환난상휼로, 재난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 돕는다는 뜻입니다. 율곡 이이의 향약은 특히 이 환난상휼을 중시하여 상호구휼을 강조하였습니다.

해주향약의 조직과 운영

해주향약의 조직 구조는 매우 체계적이었습니다. 임원으로는 도약정, 부약정, 직월, 사화 등이 있었습니다. 도약정은 나이와 덕망과 학술이 있는 한 사람을 추대하여 맡겼고, 부약정은 학문과 덕행이 있는 두 사람을 추대하였습니다. 직월은 매 모임마다 교대로 바꾸었으며, 사화는 1년에 한 번씩 교체하였습니다.

해주향약의 특징적인 점은 신분에 따라 역할을 구분한 것입니다. 약장과 유사 등 조직의 주요 임원은 양반에 한하여 직임을 주었고, 장무, 고직, 사령 등 실무직은 서얼이나 천인 중에서 뽑아 임명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신분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실무적인 효율성을 추구한 것이었습니다.

향약 모임은 한 달 건너 초하룻날, 즉 1월, 3월, 5월, 7월, 9월, 11월의 초하룻날에 열렸습니다. 모임에는 선성과 선사의 지방을 설치하고 향을 피우며 예를 행하였으며, 맹세문을 낭독하는 엄숙한 의식이 진행되었습니다.

해주향약의 입약 절차와 장부 관리

해주향약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규약문을 보고 두어 달 동안 잘 생각한 후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행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가입을 청할 수 있었습니다. 가입을 청하는 이는 단자를 갖추어 참여하기를 원하는 뜻을 서술하고, 약정이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허락한 후에야 입약할 수 있었습니다.

해주향약은 세 가지 장부를 두어 체계적으로 관리하였습니다. 첫째 장부에는 입약을 원하는 사람을 기록하고, 둘째 장부에는 덕업이 볼 만한 사람을 기록하며, 셋째 장부에는 과실이 있는 사람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장부들은 직월이 관리하다가 매 모임 때 약정에게 알려서 각각 차례를 매겼습니다.

선적에 기록된 사람이 허물을 지었더라도 쉽게 삭제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형제에게 우애하지 못하거나 음간으로 금령을 범하는 등 크게 패륜한 행실이 있은 후에야 선적에서 말소하고 향약에서 쫓아냈습니다. 반대로 악적에 기록된 것은 허물을 고친 것을 명백히 안 후에야 공론으로 말소하였습니다.

해주향약의 경제적 운영

해주향약은 경제적으로도 체계적인 운영 방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처음 향약을 세울 때 약에 참여한 사람은 각각 무명 한 필, 삼베 한 필, 쌀 한 말씩 내어 사화에게 위임하여 서원에 간직해 두었습니다. 또한 매년 11월의 모임 때는 각 약원들이 쌀 한 말씩 내어서 사화가 거두고 저장하여 용도에 댔습니다.

쓰고 남는 것이 있으면 백성에게 놓아서 10분의 2의 이식을 받아 사창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규율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경제적 상부상조를 실현하려는 율곡 이이의 혜민정신을 보여줍니다.

해주향약의 상호부조 제도

해주향약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규정된 부분은 경조사와 재난 시의 상호부조였습니다. 경사에 기증할 때는 예의 크고 작음에 따라 예물의 다소를 정하였는데, 대과 급제는 무명 다섯 필과 쌀 열 말, 생원·진사는 무명 세 필과 쌀 다섯 말, 그 외 관례나 처음 하는 벼슬은 무명 한 필과 쌀 세 말을 부조하였습니다.

상사에는 물건으로 부조하는 것과 몸으로 일을 돕는 것이 있었습니다. 약원의 상사라면 초상에 삼베 세 필을 보내고, 각 약원들은 쌀 다섯 되와 빈 거적때기 세 닢씩 내어서 치상을 도왔습니다. 장례에는 각각 힘센 종 한 명씩 보내되 이틀 양식을 지니고 가서 일을 돕게 하였습니다.

불이 나서 집을 다 태운 경우에는 약원들이 의논하여 지붕에 덮을 풀 세 마름과 재목 두 조씩 각각 내고, 또 힘센 종 한 사람씩 보내되 사흘 양식을 지니고 가서 집 짓는 일을 돕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규정들은 해주향약이 실질적인 공동체 생활의 지침서였음을 보여줍니다.

해주향약의 악행 규제

해주향약은 악적에 오르는 행동을 매우 명확하게 규정하였습니다. 부모 등에게 윤리 규정에 어긋난 행위를 한 자는 물론이고, 삼촌이나 형에게 욕을 한 자, 친상을 당하고 한 달이 못 되어 술을 마신 자, 상복을 입고 술에 취한 자, 하인을 시켜 제사를 지내게 한 자 등이 악적에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부모 앞에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자, 말을 타고 가면서 부모를 보고도 내리지 않은 자, 바깥에서 상전을 욕한 자, 상전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자 등도 악적에 해당되었습니다. 이처럼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행동까지 규제함으로써 유교적 질서를 향촌 사회에 정착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해주향약의 역사적 의의

해주향약은 이황의 예안향약에 비해 체제와 내용이 훨씬 구체적이어서 조선 후기 향약 시행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율곡 이이가 황해도 감사 자리에 5개월 정도만 재직하고 물러났기 때문에 해주향약은 원래 취지대로 충분히 시행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완벽한 체제와 구체적인 내용은 이후 전국의 향약 시행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해주향약은 단순히 교화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사창 제도를 통한 경제적 구휼, 상호부조를 통한 공동체 결속, 악행 규제를 통한 질서 확립 등을 종합적으로 추구한 향촌 자치의 모범이었습니다. 율곡의 개혁 사상과 실용주의가 잘 반영된 해주향약은 조선 후기 지방 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해주향약은 중국의 여씨향약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실정에 맞게 창조적으로 변용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환난상휼의 조목을 매우 상세하게 규정하여 실질적인 상부상조를 강조한 점은 율곡 향약의 특징이었습니다. 이는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향약을 만들고자 했던 율곡의 경세철학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날 해주향약은 조선시대 지방자치와 공동체 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상호부조와 협동의 전통을 현대 사회에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