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약은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으로, 지방의 향인들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자는 약속입니다. 이는 중국 북송 말기 섬서성 남전현에 거주하던 도학자 여씨 4형제가 만든 '여씨향약'에서 유래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인 공동체적 상규상조의 정신에 유교적 가치를 더하여 재편한 독특한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향약의 기원과 전래
향약의 시초는 중국 북송 말기인 11세기 후반, 섬서성 남전현의 도학자 여씨 4형제(여대충, 여대방, 여대균, 여대림)가 일가친척과 향리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만든 '여씨향약'입니다. 이후 남송의 주자가 이를 가감 증보하여 '주자증손여씨향약'을 완성했으며, 이것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우리나라로 전래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향약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은 1517년(중종 12년) 함양 유생 김인범의 건의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518년 김안국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할 때 '여씨향약언해'를 간행하여 전국적으로 보급하려 했으나, 조광조 일파의 몰락과 함께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향약의 4대 덕목
향약의 핵심은 네 가지 기본 덕목으로 구성됩니다:
덕업상권(德業相勸) - 좋은 일은 서로 권장하고 장려한다는 뜻으로, 구성원들이 덕행과 학업을 서로 격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실상규(過失相規) -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서로 규제하고 타이른다는 뜻으로, 구성원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아 주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예속상교(禮俗相交) - 서로 사귈 때에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유교적 예절과 풍속으로 서로 교제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환난상휼(患難相恤) -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서로 도와야 한다는 뜻으로, 재난이나 곤경에 처한 구성원을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돕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향약의 발전과 지역적 특색
16세기 중반 이후 향약은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재편되었습니다. 특히 이황(퇴계)의 예안향약과 이이(율곡)의 해주향약, 서원향약 등이 대표적입니다.
예안향약은 1556년 이황이 56세에 제정한 것으로, 여씨향약의 4대 덕목 중 과실상규를 중요시하여 28조항 모두 처벌대상자만을 규정한 특징을 보입니다. 이는 주로 도덕 질서와 계급 질서의 안정에 주안점을 둔 것이었습니다.
해주향약은 1574년 이이가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한 후 실시한 것으로, 예안향약에 비해 체제와 내용이 훨씬 구체적이어서 한국 향약으로서는 가장 완벽한 유형으로 평가받습니다. 이이의 향약은 약원을 중심으로 여론을 일으켜 관권을 견제하고 향권을 지키려는 지방자치적 성격이 농후하게 나타났습니다.
향약의 조직과 운영
향약의 조직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했지만, 일반적으로 도헌, 부헌, 직월 등의 임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조직의 임원인 약장, 유사 등은 양반에 한하여 직임을 주었고, 장무, 고직, 사령 등은 실무직으로 서얼이나 천인 중에서 뽑아 임명했습니다.
향약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는데, 군현 단위에서는 향안, 향규, 향약, 향립약조, 입법 등으로, 촌락 단위에서는 동안, 동계, 동약, 촌계 등 다양한 명칭으로 나타났습니다.
향약의 기능과 역할
향약은 여러 가지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교화 기능 - 지역 주민들에게 유교적 가치관을 교육하고 교화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질서 유지 - 지역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범죄를 예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상부상조 -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서로 돕는 상부상조의 정신을 실현했습니다.
주민 결속 - 지역 주민들이 서로 돕고 배려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주민 간의 유대감을 높였습니다.
향약의 역사적 전개
향약은 조선시대를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했지만, 그 성격도 시대에 따라 변화했습니다. 초기에는 개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시작되었으나, 지방 사림이 보수화되는 추세에 따라 폐쇄성이 점차 강화되고 농민에 대한 통제의 기능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농민 수탈의 도구로 전락하는 면도 나타났습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실학자 정약용은 향약의 폐단이 도둑보다 심하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향약이 본래의 상부상조 정신에서 벗어나 지배층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대표적인 향약 문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약 문헌으로는 태인 고현동 향약이 있습니다. 이는 성종 6년(1475) 정극인이 처음으로 만들고, 송세림이 기반을 닦아 시행된 이래 500여 년 동안 전라북도 태인현 고현동에서 꾸준히 운영되어 왔습니다. 현재 보물 제118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선조 35년(1602)부터 1977년까지 400여 년간의 자료가 남아 보존되어 있어 향약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향약의 한계와 폐단
향약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여러 한계와 폐단도 있었습니다:
계급적 성격 - 향약은 본질적으로 양반들의 향촌자치이자 하층민 통제수단이라는 한계를 가졌습니다.
수탈의 도구화 - 토호와 향반 등 지방 유력자들이 주민들을 위협하고 수탈하는 배경을 제공했습니다.
내부 갈등 - 향약의 간부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여 다투고 모함함으로써 오히려 풍속과 질서를 해치는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향약의 현대적 의미
향약의 전통은 현대에도 계승되고 있습니다. 새마을운동은 향약, 두레, 품앗이 같은 우리의 전통적인 협동 정신을 현대에 되살린 운동으로 평가받습니다. 새마을운동의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은 향약의 상부상조 정신과 맥을 함께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현대의 주민자치제도 역시 향약의 전통적 가치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고 상호 협력하는 정신은 향약이 추구했던 이상과 일맥상통합니다.
향약은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으로서 유교적 윤리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질서 확립과 상부상조를 위한 제도였습니다. 비록 시대적 한계와 폐단도 있었지만, 지역 공동체의 결속과 상호부조라는 향약의 기본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가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