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역사는 두 명의 강력한 최고지도자에 의해 정의되어 왔습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이끈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와 그의 뒤를 이어 36년째 이란을 통치하고 있는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는 현대 이란의 정체성을 형성한 핵심 인물들입니다. 이들 두 지도자는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과 통치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이슬람법학자통치론(벨라야트 에 파키)이라는 독특한 신정체제를 통해 이란을 이끌어 왔습니다.
이란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루홀라 호메이니
혁명 지도자로의 부상
세예드 루홀라 무사비 호메이니(1902~1989)는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로,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국왕을 몰아낸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1900년 이란의 호메인에서 태어난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시아파 종교지도자인 '물라'였던 종교적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1922년 시아파 종교학의 중심지인 콤에 정착한 호메이니는 이슬람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직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30년 부유한 집안의 딸과 결혼하면서 경제적 안정과 지위 상승의 기회를 얻었고, 이는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의 지도적 성직자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팔레비 왕조와의 대립
1950년대 들어 호메이니는 '물라' 중에서도 신앙심과 학식이 뛰어난 사람에게 쓰는 존칭인 '아야톨라'로 칭송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활동의 전환점은 팔레비 국왕의 '백색혁명'이었습니다. 백색혁명은 토지개혁으로 종교 영지를 축소시키고 여성을 정치적으로 해방하려는 팔레비의 친서방 개혁 정책이었습니다.
1963년 6월, 팔레비가 여성참정권 법안을 통과시켰을 때 호메이니는 공개적으로 팔레비를 '악의 상징'에 비유하며 그의 죽음을 경고했습니다. 1964년 10월에는 미국에서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이란 주둔 미군의 치외법권을 허용하는 법안에 대해 "이슬람 정신을 팔아먹은 매국행위"라며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망명 생활과 혁명의 준비
이러한 반정부 활동으로 호메이니는 1964년 11월 터키로 추방되었고, 이듬해 10월 이라크 나자프로 망명지를 옮겼습니다. 망명 기간 동안 호메이니는 '벨레야테 파키(이슬람 법학자의 후견권)'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이슬람 사회의 모든 법은 이슬람법에 기초해야 하고, 모든 법과 활동은 이슬람 율법의 이맘 기관에 의해 감독되어야 한다는 그의 사상을 담고 있었습니다.
1977년 호메이니 아들의 죽음은 망각 속에 잊혀가던 호메이니가 13년 만에 국민의 심장 속에서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호메이니의 든든한 후원자는 이란 전역에 흩어져 있는 18만 명의 '물라'들이었고, 8만 개의 모스크는 호메이니의 병영이자 정보선전기관 역할을 했습니다.
혁명의 성공과 이슬람 공화국 수립
1979년 1월 16일 팔레비가 이집트로 망명하자, 호메이니는 2월 1일 15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이란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서방 매체들은 6백만~8백만 명의 혁명세력이 그를 환영한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2월 11일 호메이니는 메흐디 바자르간을 총리로 한 임시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1979년 3월 30일과 31일, 임시 정부는 16세 이상의 모든 이란 국민에게 새 정부형태로서 이슬람 공화국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98% 이상이 왕정을 이슬람 공화국으로 교체하는 데 찬성했습니다. 호메이니는 "혁명 지도자"로서 종신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1989년 6월 3일 심장발작으로 사망할 때까지 이란을 통치했습니다.
36년 철권통치의 계승자: 알리 하메네이
혁명 1세대에서 최고지도자로
세예드 알리 호세이니 하메네이(1939년 출생)는 현재 이란의 제2대 라흐바르(최고 지도자)로, 1989년 6월부터 집권 중이며 이란의 제3대 대통령을 역임했습니다. 마슈하드에서 아제르바이잔계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하메네이는 어린 시절부터 마슈하드의 신학교에서 이슬람교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1958년 이란 쿰으로 이주한 하메네이는 루홀라 호메이니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이슬람주의를 제창하기 시작했습니다. 1963년에는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이 주도한 백색 혁명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다가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의 지도력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이슬람 공화당 창설 과정에 참여한 하메네이는 혁명 이후 혁명평의회 의원으로서 국방부 차관, 이슬람 혁명 수비군 사령관 등을 역임했습니다. 1981년 10월 13일부터 1989년 8월 3일까지 이란의 제3대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8년간 이라크와 전쟁을 치렀습니다.
하메네이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81년 6월 27일 테헤란에 위치한 아부자르 모스크에서 강연을 하던 도중 발생한 암살 시도였습니다. 녹음기 앞에 설치되어 있던 폭탄이 폭발하면서 팔, 성대, 폐에 큰 부상을 입었고, 이란 인민무자헤딘기구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지만 오른팔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최고지도자로의 등극과 통치 체제 강화
1989년 6월 4일 호메이니가 사망한 후, 하메네이는 이란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메네이는 최고지도자로 활약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8년간 대통령을 역임했지만, 국민적 우상이던 호메이니만큼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하메네이는 호메이니와는 다른 방식으로 통치했습니다. 호메이니가 어느 한쪽에 권력이 쏠려선 안 된다며 상호 견제가 가능한 정치 구조를 추구했다면, 하메네이는 그 반대로 자신의 측근을 중심으로 한 권력 독점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군, 정보부, 각종 사회단체, 언론계 등에 가까운 성직자들을 심어 장악력을 키워나갔습니다.
하메네이의 실용주의적 접근
하메네이의 리더십 스타일은 이념적 경직성과 전략적 실용주의를 혼합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란의 생존이 위태로울 때는 기꺼이 굽히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하메네이는 2015년 경제제재 완화를 위해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독일 총 6개국과 이란 핵합의(JCPOA)를 체결했습니다.
그는 이라크 전쟁 당시 8년간 이어진 테헤란 공습과 지상전으로 호메이니가 1988년 휴전을 수용한 것을 두고 "영웅적 유연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하메네이가 이념보다는 실질적인 국가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란의 정치 체제와 최고지도자의 권한
이슬람법학자통치론의 실현
지난 40년 동안 이란은 이슬람법학자통치론(Velayat-e Faqi) 하에 통치되고 있습니다. 이슬람법학자통치론은 이슬람 법학자들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믿음이자 정치체계이며, 이슬람법학자가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되는 신정 공화국 체제를 가리킵니다.
이슬람혁명을 통해 시아 이슬람은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틀을 갖추게 되었고,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슬람법학자 통치론을 통해 기존 왕정 체제와 완전히 다른 정치적, 문화적 변화를 이끌어가고자 했습니다.
최고지도자의 막강한 권한
이란의 정치 체제에서 최고지도자는 국가, 정치, 종교적 최고 권력자로서 국가지도자운영회의(Assembly of Experts)에서 선출되며, 종신직입니다. 하메네이는 입법, 행정, 사법 3부의 위에 있는 이란의 최고 권력자로, 신정일치인 이란에서 종교적으로 신의 대리인을 맡고 대통령 인준·해임권까지 갖고 있습니다.
최고지도자는 국가지도자운영회의와 협의하에 국가최고정책 결정권, 국가정책 집행 감독권, 임면권, 국민투표 선포권, 군통수권, 전쟁 선포 및 동원권 등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합니다. 또한 헌법수호위원회의 일부 위원, 사법부 수장, 국영 라디오 및 TV 방송국장, 합참의장, 이슬람혁명수비대장, 군사령관 등의 임면권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란의 대외정책과 지역 패권 추구
핵개발 프로그램의 역사
이란의 핵 개발은 1950년대 친미 성향의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국왕 시절에 시작되었습니다. 팔레비 국왕은 에너지 공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협력하며 민간용 핵 개발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1967년 이란에서 처음으로 미국이 제공한 실험용 원자로가 가동에 들어갔고,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했습니다.
하지만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과 서방 국가들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양국의 원자력 협력도 모두 중단되었습니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계속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이란이 핵무기 개발에 눈을 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정권이 핵 개발을 추구했고, 이에 자극받은 호메이니도 중단했던 핵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재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항의 축' 구축과 지역 영향력 확대
하메네이는 혁명 이후 체제 수호를 위해 창설된 최정예 부대 이란혁명수비대(IRGC)를 통해 내부 단속은 물론 대외 강경책을 폈습니다. 레바논 헤즈볼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하마스, 예멘 후티 반군 등 중동 일대 민병대를 지원해 친이란 무장단체 '저항의 축'을 만들었습니다.
하메네이의 통치 아래 이란은 영향력을 확대하며 중동의 강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메네이 집권 기간 이란은 적대국과 직접적 갈등을 피하면서 '저항의 축'으로 알려진 헤즈볼라, 후티 반군, 하마스 등과 군사 동맹을 강화했습니다.
현재의 도전과 미래 전망
최대 위기에 직면한 하메네이 체제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후 상황이 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하마스와 헤즈볼라가 약화하면서 이란의 세력 역시 약해졌고, '이란이 건드릴 수 없는 강대국'이라는 인식이 무너졌습니다.
2025년 6월 현재, 36년간 절대 권한을 행사한 하메네이는 최대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밀 타격으로 최측근이 대부분 제거되었고, 에너지 시설 등 인프라가 광범위하게 파괴되었습니다. 하메네이는 "절대 항복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핵심 참모들이 사망하면서 지도부 내부에 큰 공백이 생기고 전략적 오판 가능성도 커졌습니다.
내부 불만과 체제 위기
이란 사회 내에서는 크게 보수 강경파와 개혁파로 나누어져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내부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이란 청년들은 이란의 지도부와 혁명을 지지했던 이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2022년에는 22세의 여대생 마흐사 아미니가 도덕경찰에 구금된 이후 사망하면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인권 침해와 사회적 자유 제한에 더해 좋지 못한 경제 상황도 불만이 커지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12개월간 물가 상승률이 무려 43%를 기록하는 등 이란의 핵 활동에 대한 서방의 제재로 이란 경제는 휘청이고 있습니다.
후계 구도와 체제 전환 가능성
하메네이가 사망할 경우 이란은 더 큰 혼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신정체제의 뚜렷한 후계자가 없는 가운데 핵무기 개발에 적극적인 강경파가 군부 중심의 새로운 독재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됩니다. 또한 하메네이 중심의 신정체제가 무너지면 이란이 민족적 분열을 겪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란에는 아랍인, 아제르바이잔인, 쿠르드족, 발루치족 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분리독립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맺음말: 두 지도자가 남긴 유산
호메이니와 하메네이라는 두 명의 최고지도자는 각각 다른 시대적 배경과 도전 속에서 이란을 이끌어 왔습니다. 호메이니는 혁명의 아버지로서 이슬람 공화국의 기틀을 마련했고, 하메네이는 36년간의 장기 집권을 통해 체제를 안정화시키고 이란을 중동의 지역 강국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1979년 이슬람혁명이 약속했던 사회 정의, 자유와 민주주의,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이라는 목표는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현재 이란은 내부적으로는 젊은 세대의 변화 요구와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고, 대외적으로는 이스라엘과의 갈등으로 체제 존립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란의 미래는 하메네이 이후의 후계 구도와 함께 국민들의 변화 요구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호메이니가 꿈꾸었던 이슬람 공화국의 이상과 하메네이가 구축한 현실적 체제 사이에서, 이란은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