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실에는 수많은 왕녀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휘숙옹주(徽淑翁主)만큼 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은 드뭅니다. 성종의 후궁인 명빈 김씨 소생으로 태어나 연산군 시대에 최고의 영화를 누렸으나, 중종반정 이후 모든 권세를 잃은 그녀의 일생은 조선시대 왕실 여성의 비극적 운명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출생과 가문 배경
휘숙옹주는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과 후궁 명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3남 3녀 중 장녀입니다. 정확한 생년은 전해지지 않으나, 1491년에 혼인한 기록으로 미루어 1482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조선의 공주들은 일반적으로 10세 이후에 혼인을 했기 때문입니다.
휘숙옹주의 어머니인 명빈 김씨는 형조 판서를 지낸 김작의 딸로, 성종 대에는 종4품 숙원이었으나 후일 정1품 빈으로 추증되었습니다. 명빈 김씨는 성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이 바로 훗날 폭군으로 유명한 무산군이며, 딸들이 휘숙옹주, 경숙옹주, 휘정옹주입니다.
휘숙옹주의 배다른 오빠가 제10대 왕인 연산군이며, 배다른 동생이 제11대 왕인 중종입니다. 이러한 가족관계는 후일 휘숙옹주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임숭재와의 혼인
1491년 8월 27일, 휘숙옹주는 임사홍의 넷째 아들인 임숭재를 부마로 맞이하여 혼례를 올렸습니다. 임숭재는 이때 풍원위에 봉해졌습니다. 당시 풍천 임씨 가문은 왕실과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임사홍은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손주 사위였으며, 그의 장남 임광재는 예종의 딸인 현숙공주와 혼인하여 풍천위에 봉해졌습니다. 결국 임사홍의 큰아들과 넷째 아들이 각각 왕의 딸들과 혼인함으로써 왕실과 겹사돈을 맺은 것입니다. 이에 따라 휘숙옹주는 사촌 언니인 현숙공주와 동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혼례 당일 불길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임숭재의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옹주는 혼인 첫날부터 이웃집에 의탁하여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성종실록』의 사관은 이를 두고 "임사홍이 소인으로 불의로써 부귀를 누렸으며, 그의 아들 임광재가 이미 공주에게 장가를 갔는데, 또 다른 아들이 옹주에게 장가를 갔으니, 복이 지나쳐 도리어 재앙이 발생하는 바람에 불이 그 집을 태워버린 것"이라고 논평했습니다. 당시에도 임사홍과 임숭재 부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강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휘숙옹주와 임숭재 사이에는 세 명의 딸이 태어났습니다. 큰딸은 전주 최씨인 최국광과 혼인하였으며, 둘째 딸과 셋째 딸은 각각 연안 이씨 이인수, 순창 조씨 조노성과 혼인하였습니다.
연산군 시대의 영화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휘숙옹주와 임숭재의 삶은 큰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연산군은 명빈 김씨의 자식들과 비교적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왕위에 오른 후 휘숙옹주에게 땅과 노비 등 물질적으로 많은 혜택을 주었습니다.
임숭재 또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는 춤과 노래에 일가견이 있어 1501년에는 승정원과 의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승진하였으며, 장악원 제조에 임명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장악원은 국가와 왕실의 공식 행사를 맡아보는 관청으로 음악, 노래, 춤을 담당하는 곳이었습니다.
1504년 갑자사화가 발생했는데, 이는 임숭재의 집에 놀러 온 연산군에게 임사홍이 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한 전말을 알려주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임숭재와 임사홍은 연산군과 더욱 가깝게 지내며 최측근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1505년 임숭재는 채홍준사라는 직책에 임명되었습니다. 채홍준사로서 그의 업무는 경상도의 미녀와 준마를 구하여 연산군에게 바치는 것이었는데, 그가 행차할 때면 도내 사람들이 모두 놀라 피신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궁궐 내에 거주할 기녀들을 선발하고 관리하는 것도 그의 임무였으며, 이 모든 것이 연산군의 유흥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임숭재의 위세는 매우 당당해서, 당시 임숭재가 옥교를 타고 지나갈 때면 사람들이 "임금의 행차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1505년 2월에는 연산군이 창경궁과 임숭재·휘숙옹주의 집 사이에 있는 40여 채의 집을 헐어내고 담을 쌓아 서로 통하게 할 것을 지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연산군과의 스캔들
휘숙옹주와 연산군 사이에는 불미스러운 소문이 있었습니다. 연산군은 다른 이복형제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유독 휘숙옹주만은 여러 차례에 걸쳐 땅과 노비를 하사받는 등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부터 옹주와 연산군이 간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연산군일기』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야사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연산군은 기생뿐만 아니라 조정 대신들의 딸 및 부인들, 심지어 종친들과도 간통을 하였는데, 그중 한 명으로 휘숙옹주가 지목되었던 것입니다.
1505년 11월 임숭재가 갑자기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자, 연산군은 많은 부의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까지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한편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휘숙옹주와 간통한 일이 염려되어 중사를 보내 관을 열고 임숭재의 입에 무쇠 조각을 물려 진압시켰다고도 전해집니다. 야사에는 임숭재가 자신의 부인과 연산군의 간통 사실에 충격받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중종반정과 몰락
임숭재 사후에도 휘숙옹주는 연산군으로부터 토지를 하사받는 등 여전히 여러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휘숙옹주는 이전에 누리던 권세를 박탈당하였습니다.
임숭재가 채홍준사 등의 관직에 있으면서 연산군으로부터 받은 노비 및 집 등을 도로 국가에 돌려줘야 했고,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시아버지 임사홍은 처형되었습니다. 임숭재의 경우 이미 죽었으므로 부관참시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기되었으나, 휘숙옹주의 부마이고 옹주가 살아있었던 덕분에 부관참시는 면할 수 있었습니다.
중종은 휘숙옹주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임숭재의 부관참시와 가산 적몰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휘숙옹주는 중종의 배다른 동생이었고, 임숭재는 엄연한 성종의 부마였기 때문에 왕가의 위신을 고려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말년과 죽음
이후 휘숙옹주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습니다. 야사에서는 반정 세력에 의하여 숙청되었다는 설과 돌팔매를 맞아 죽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입니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1530년 휘숙옹주의 사위 최국광이 주색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옹주의 큰딸이 어렵게 살자, 중종은 "옹주의 딸은 성종의 친손주이며 왕실의 지친"이라 하여 최국광이 기생들에게 준 재산을 되찾아서 옹주의 딸에게 주도록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옹주의 딸 또한 성종의 손주라며 신경을 쓰는 것만 보아도 성종의 딸이었던 휘숙옹주가 야사와 같은 비참한 죽음을 맞았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휘숙옹주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묘소에 있는 묘표가 조성된 시기로 보아 1511년 이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휘숙옹주의 묘소는 부마 임숭재와 합장묘로 조성되었는데, 현재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능현리에 있습니다. 합장묘 앞에 있는 묘표의 앞면에는 '숭덕대부풍원위임공지묘 휘숙옹주지묘'가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정덕육년사월일'이 새겨져 있습니다.
역사적 평가
휘숙옹주의 삶은 조선시대 왕실 여성의 운명이 얼마나 정치적 상황에 좌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성종의 서녀로 태어나 왕실의 인척인 임사홍 가문과 혼인한 그녀는, 이복 오빠인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며 최고의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과 그녀의 시아버지 및 남편이 연산군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악명을 떨친 것, 그리고 연산군과의 불륜 스캔들은 그녀의 명예에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중종반정 이후 모든 권세를 잃었지만, 그래도 성종의 딸이자 중종의 배다른 동생이라는 신분 덕분에 최소한의 예우는 받으며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휘숙옹주의 일생은 권력의 정점에서 몰락까지를 경험한 비극적인 삶이었으며, 조선시대 왕실 여성이 처한 현실과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평가됩니다.